한일합방과 일제의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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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기계적 영감설이나 무오설에 대하여 이해하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는 성서연구의 근본목적은 저자의 소성이나 역사적 배경이나 문자의 배열을 추궁하자는 것보다는 성서가 우리에게 주는 심령적 견식과 영감과 동력을 얻자는 데 있다. 다음으로 그의 신학에서의 강력한 사회적 관심과 윤리성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장로교의 내세적 부수신앙 일변도에서 교회의 관심을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에 돌리게 한 것이다. 그의 구원론은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으로 구성되어 이 두 가지 구원을 동등하게 강조하고 있는 것이 그의 구원론의 특징이다.
11. 조선신학교의 설립
평양에서는 장로회신학교를 대신하여 평양신학교가 한국인의 손으로 개교되던 때에 서울에서는 거의 동시에 조선신학원의 설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결국 서울에서 1939년 3월 27일에 "조선신학교설립기성회"가 조직되어 기금을 모았다. 실로 한국인의 손으로 또 그 돈으로 세워진 최초의 신학교로 조선신학교 설립의 의의는 클 뿐 아니라 이 신학원의 교육노선이 지금까지의 선교사 주도하의 장로교 신학교육노선과는 아주 상반되는 교육의 혁명을 초래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결과적으로 조선신학원의 설립으로 선교사들에 의한 한국 장로교의 신학교육 독점시대는 이미 끝났음을 의미한다. 그만큼 한국 교회는 신학적으로도 성숙하였음을 말해 준다.
12. 신사참배강요와 그 반대운동
일제 36년 통치기간중에 일제가 한국교회에 가한 야만적 탄압 중에 이 심사참배강요는 마지막에 해당하는 발악이었다. 이 마지막 박해에서 교회가 분열되었다. 또 선교사와 한국교회도 대립되었다.
1)신사, 일선동근동조론의 표상
일제는 일선동근동조론을 식민주의사관에서 언급한다. 일본과 조선은 이제 비로소 함께 옛날에 같이 섬기던 신을 봉제하게 되는것이니 천조대신이 조선인에게 전혀 새로운 신이 아니라는 지론이다. 이렇게 신사를 종교와 정치의 혼합물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종교적 또는 정치적 이유로도 이를 거부하지 못하도록 교묘하게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2)참배강요와 반대운동
일제는 먼저 기독교계 학교부터 강요하였다. 장.감 선교부는 신사에 대한 태도에 따라 학교를 패쇄하기도 하고 또는 이를 받아들이고 학교를 계속 운영하였다. 장로교 선교부는 신사참배를 종교적으로 받아들였고 감리교 선교부는 이것을 정치적으로 즉 국민의례로 받아들였다. 참배반대에는 학교폐쇄로 대처했기 때문에 눈에 가시였던 미션학교를 정리하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나중에는 제일 큰 교단인 장로회도 강압적으로 1938년 제28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하게 되었으나 교단내에서 이 결의에 순복할 수 없다는 신앙의 수호자들이 나타나 조직적으로 반대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먼저 개인적인 합법적인 반대운동은 박관준 장로가 벌인 진정서 투척사건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그후 조직적인 반대투쟁은 1939년 초부터 시작되었다. 반대운동의 중심지는 주기철 목사가 시무하던 평양 산정현교회였다. 북쪽에서 활발한 반대운동이 일어나고 있을 때 남쪽 경남에서는 부산의 초량교회 한상동 목사가 강력한 대응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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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2.10.05
  • 저작시기2002.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05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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