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정권의 수립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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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북한 정권의 수립과정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일제감정기의 공산주의운동
1. 한국인이 공산주의운동을 접하게 되는 배경
2. 한인공산주의조직의 성립 및 와해
3. 김일성과 항일무장투쟁

Ⅱ. ‘인민민주주의 혁명시기’와 ‘사회주의혁명 준비기’
1. 1단계 인민민주주의 혁명시기(일제하~1947년)
2. 사회주의 혁명의 준비기(1947~1950)

Ⅲ.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의 설치
1. 북조선 분국의 설치 배경
2. 북조선 분국 설치를 위한 실질적 과정
3. 김일성에 의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조직정비
4. 북조선분국 설치 인가
5. 지도부의 구성

Ⅳ. 반제반봉건개혁의 실시
2. 산업 국유화
3. 반제반봉건개혁의 성공 이유

Ⅴ. 북조선노당의 창당

Ⅵ. 김일성의 권력장악 요인 및 과정
1. 소군정의 강력한 후견
2. 민주개혁
3. 좌․우파의 합작과 숙청

◎ 참고문헌

본문내용

최초의 공식적이고 합법적인 내각이 구성된 것이다. 인민회의나 인민위원회나 모두 실질적이고 합법적인 기관이었지만 북한 정권의 규정에 따라 “조선에 민주주의 임시정부가 수립될 때까지”만 존속하는 일시적인 국가기관이었다.
Ⅵ. 김일성의 권력장악 요인 및 과정
김일성이 다양한 정치적 경쟁세력을 물리치고 쉽게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던 요인에는 많은 것이 있지만 여기서는 소군정의 강력한 후견, 민주개혁을 통한 민중적 정통성의 부분적 확보, 현실주의적인 통일전선의 전개를 통해 좌우파의 합작, 반대파의 숙청을 중점으로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소군정의 강력한 후견
소련군 사령부는 45. 10. 14일 ‘김일성 장군 환영 평양시 군중대회’에서 최초로 김일성을 대중 앞에 소개하였다. 이미 45. 9. 28일 민족주의적 공산주의자 현준혁의 살해사건을 통해 소련의 의도를 알아차린 민족진영 인사들은 남하하거나 지하로 숨어버렸다. 소련은 신의주학생의거를 계기로 민족계 인사들의 제거에 전력을 기울이는 한편, 김일성을 북한의 제 2인자로 부각시켜 나갔다.
46. 1. 5일 조만식은 3상회의 결과인 ‘신탁통치 5개년 결정’에 대하여 반대입장을 표명하면서 모든 직책에서의 사퇴의사를 표명하였다. 이에 소련은 회유와 협박 끝에 조만식을 감금하게 되고, 조만식의 지도하에 있던 ‘조선민주당’ 간부들은 남한으로 몸을 피신하기 시작했다. 이에 소련군 사령부는 북한정권의 수임자로서 김일성을 택하고,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결성하면서 토지개혁 세칙을 공포하였다. 이제는 김일성을 제 1인자로 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개혁의 주체가 되었다.
그 후 48. 2월에 소군정의 도움으로 김일성이 ‘조선인민군’을 창설했는데, 이 조선인민군의 창설로 항일무장투쟁세력으로서 독자적인 무장력을 지니고 있었던 연안에서 김원봉이 이끌고 오는 ‘조선의용군’을 무장 해제시킴으로써, 더욱 강고한 권력적 토대를 확보하였다. 동시에 소련계 한인인 방학세가 보안국의 책임을 맡음으로써 국내 치안문제 역시 소련군의 후견과 항일빨치산 계열의 통제하에 있었다. 반면에 군대는 민족보위성에 소속되었는데 민족보위상은 최용건이었고, 부상은 김일, 북한 군대의 총사령관은 강건으로서 모두가 빨치산 출신들이었다.
2. 민주개혁
초기의 북한 지도부는 인민민주주의 정권의 구체적인 실천 사업으로서 우선 경제적인 분야에서는 대중 산업의 국유화 완성, 토지개혁의 완성, 농업생산의 조합화 강화, 대량적 집단화 실시를 위한 대책 수립 등을 중심이 된 정책으로 설정하면서 인민민주제도의 경제적 기초를 더욱 강화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사회개혁 중에서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북한의 지도부가 가장 역점을 두었던 부문은 토지개혁 분야였다. 이것으로 인해 사회의 경제적 토대를 근본적으로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사회적으로도 김일성 반대세력 제거라는 부수적인 효과를 거두게 되었다. 다른 한편 공산당의 대중적 지지 기반을 확대시키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3. 좌우파의 합작과 숙청
46. 7. 29일 신민당 위원장인 김두봉이 공산당 책임비서인 김일성에게 제청하는 형식으로 양당 합당을 위한 연석 중앙확대위원회를 열어 합당이 결정되었고, 8월 28일 ‘북조선로동당 창립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대회에서 김두봉이 북로당의 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면서도 자신의 연설 말미에 ‘김일성 장군 만세’라는 구호를 집어넣었다. 김일성은 국내파 공산주의자인 주영하와 함께 부위원장에 선출되었으며 모든 연설에서 박헌영에 대한 찬사의 구호는 사라졌다.
조선인민군 창건이 발표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48. 3월에 북조선로동당 제 2차 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에서 김일성은 소련파와 손을 잡고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을 맹렬히 공격하였다. 비난의 초점이 국내파 공산주의자의 거두인 오기섭 등에게 맞춰졌고, 오기섭을 비롯한 국내파들은 자기 비판을 해야했다. 이 과정에서 연안파는 대체로 침묵을 지켰다.
김구와 김규식은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에 참여하는 것을 단념하고, 4월에 북한에서 개최된 ‘남북조선 제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 참석하였다. 남한에서 510 총선거가 실시되어 단정 수립이 확실시되자 북한도 단정 수립의 길로 들어섰다. 먼저 북한은 제 2차 남북 지도자협의회를 제의하는 초청장을 김구와 김규식에서 발송하였다. 제 1차 남북 연석회의 이후 그대로 남아 있던 남측 인사들이 70여 명 정도 있었지만, 이들만으로는 정당성 확립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김구와 김규식을 다시 부른 것이다. 김구와 김규식은 서신만으로는 판단을 내리기 어려웠기 때문에 홍명희를 통하여 상의하고 싶다고 제의하였지만, 김일성은 홍명희 대신 성시백을 밀파하여 2차 서한을 띄웠다. 하지만 김구와 김규식은 북한도 역시 단정을 수립하겠다는 것으로 이해하고 이 제안을 거부하였다.
김일성이 북한공산당, 즉 로동당 위원장으로 선출된 것은 49년 6월 남로당과 북로당의 합당을 통해 ‘조선로동당’이 창당되면서이다. 당의 위원장은 김일성이었고, 남로당의 위원장이었던 박헌영은 김일성에게 종속된 제1부위원장이었다. 이제 형식상으로도 한국 공산주의운동의 구심점은 김일성이었고, 평양이었다.
북한에 지지 세력이 없는 가운데 정권을 잡은 김일성은 정권 유지를 위해서는 지속적인 숙청이 요구되었다. 김일성은 토착공산주의자 오기섭을 제거하고자 그 추종자 주영하를 최대로 이용하다가 52년 12월 세력확장에 두려움을 느껴 숙청을 하였고, 함남지방의 주축세력인 오기섭도 57년 초에 투옥하여 제거하였다.
뿐만 아니라 53년 3월에 625의 패전 원인을 이승엽을 비롯한 남로당계 인사에게 전가시켜 미국의 고용간첩 및 쿠데타 음모 협의로 박헌영을 제외한 남로당계열 수뇌들을 모두 제거하였다. 박헌영도 55. 12월 간첩활동 및 쿠데타 음모, 파괴 및 살인 죄명으로 사형에 처해졌다. 김일성은 국내파를 숙청하는 데 쫓겨 연안파의 숙청시기를 미루어 왔는데, ‘8월 종파사건’을 계기로 연안파마저 숙청하기에 이른다.
◎ 참고문헌/ 통일시대의북한학강의/ 북한체제의수립과정/ 현대북한학/ 북한현대사101장면/ 북한현대사/ 한국현대사(강만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민족분단과통일문제/ 북한정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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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10.04
  • 저작시기2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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