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연극의 발전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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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연극 발전의 방향 모색
1. 상업연극 및 비영리 연극의 필요성
2. 비영리연극 단체의 설립
3. 법인화
4. 전문적인 극장경영(학위)프로그램
5. 비영리 연극의 극장 설비

우리나라 국제예술제의 의미와 발전방향. 국제연극제의 발전 방향
우리 연극 발전에 꼭 필요한 장치
1. 세심한 배려와 정책적 지원 필요
2. 용기있고 소신있는 연극 작업을 지속시키는 에너지원
3. 우리 연극을 해외에 알리는 기회로서의 역할
4. 작품 선정의 기준 마련되어야.......
5. 전문인력과 조직력 필요

한국연극기원

본문내용

조의 개선이 필수적이다. 우선 전문인력이 크게 보강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선망해 마지않는 프랑스의 아비뇽축제나 영국의 에딘버러국제축제는 항구적인 상근 조직이 20명 안팎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말고도 축제기간 등에 아비뇽은 500명 남짓한 별도의 조직을 가동해 극장의 스태프, 티켓 판매, 홍보 업무 등을 맡고 약 100명의 자원봉사자들을 동원한다. 이 많은 인원들이 공식 참가작 40여 편을 주로 보살핀다. 자유 참가작은 300여 편에 이르지만 그 운영은 전적으로 극단이 책임진다. 연인원 관객들은 11만 명 정도다. 에딘버러의 경우는 1천 100여 개의 단체가 참가하고 약 50만 명의 관객이 모이는 종합예술제로서 축제기간 중에는 상근 요원을 합해서 270명이 넘는 전문조직과 2천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투입된다. 행사의 규모에 걸맞는 하부구조의 규모를 갖는 것이 국제연극제의 성공적인 개최에 필수적임을 알 수 있다. 우리의 경우처럼 단기에 동원되는 유·무급의 부족한 요원들로는 효율적인 축제운영이 불가능하다. 예약하기도 힘들고 입장권을 발권 받는 데도 시간이 많이 들어서 관객들이 짜증을 낼 정도의 하부구조로 국제연극제를 개최한다는 것은 만용에 가깝다.
넷째 극장의 기술요원들에게 전문적인 훈력과 태도교육이 강화되어야 한다. 외국의 공연단체들이 한국에 와서 가장 공통적으로 느끼는 불만사항이 둘 있는데 하나는 기술적인 설비를 제대로 활용할 줄 모른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술가들의 요구에 응하는 태도가 배타적이라는 것이다. 둘 다 예술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있어서 치명적인 결함들이다. 우리의 극장 기술요원들은 예술가들이 하나의 아이디어를 실현해 내기 위해서 들이는 공에 대해 존중할 줄 알아야 하겠고 예술가들의 요구를 묵살하면서 극장장의 눈치를 살피는 관료주의를 속히 탈피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국제연극제는 우리 연극의 발전에 꼭 필요한 장치다. 주제적 특징이 있고 관객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작품선정이 이루어지고 공연 전반을 조직적으로 통솔할 수 있는 상근 조직과 공연의 예술적 완성도를 즐겁게 실현할 수 있는 기술요원들로 하부구조를 튼튼히 만드는 것이 우리가 이번 세계연극제에서 실현하지 못한 그러나 장차 예정된 수많은 국제연극제들을 성공적으로 개최하기 위한 조건이요, 첩경이다.
【한국연극기원】
한국 연극의 기원을 고대의 제의(祭儀)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은 연극의 기원에서 이미 언급하였다.
삼국시대의 고대연극은 서역악(西域樂)의 영향 아래 발전한 고구려악(高句麗樂), 백제의 기악(伎樂), 신라의 처용무(處容舞) 및 오기(五伎) 등이 가무백희(歌舞百戱)를 통합한 것으로서 음악·무용 및 연극이 분화되지 않은 상태의 연희로서 대표될 수 있고, 이미 거기에는 대륙 전래(傳來)의 요소와 토착적 요소의 상호교섭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전승(傳承)이 옳지 못했던 탓이었으나, 그래도 어느 정도 그 원형을 짐작케 하는 것은 가면무극(假面舞劇)으로서 고려와 조선을 통하여 궁중나례(宮中儺禮)에 연희된 처용무뿐이다.
고려시대의 연극은 팔관회(八關會)와 연등회(燃燈會) 등의 국가적 행사에서 연원하여 의식과 오락의 두 가지 요소가 혼합된 산디놀음과 백희(百戱)를 들 수 있는데, 산디란 상당한 규모의 장식적인 무대를 지칭한다. 한편, 탈(가면)을 쓰고 주문을 외면서 악귀(惡鬼)를 쫓아내는 행사인 나례 역시 연극과 깊이 관계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여기에다 화극적(話劇的) 요소인 조희(調戱)까지 생각해 본다면 고려연극의 대강은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재인(才人)·광대(廣大) 등 전통적으로 배우와 그 부류를 지칭하는 명칭이 처음 등장하였다. 조선시대에 와서도 산디놀음과 나례는 성행하였고 조정에는 사신 영접과 공의(公儀) 등을 위한 산대도감(山臺都監)까지 둔 일이 있었으나 조선 중기 이후로 폐지되었으며 현존하는 산디놀음 계통의 연희는 그것이 서민들에게 넘어간 이후의 가면극들이다. 즉, 그것은 양주별산대(楊州別山臺)놀이, 봉산(鳳山)탈춤, 경남 일대의 오광대(五廣大)·야류(野遊) 등 민속적인 가면극의 여러 형태로 남게 되었다고 본다. 다만 여기에는 산디로 간 계통과 별개로 농경의례·무속(巫俗)놀이·서낭제 등 순수한 민속적 성격의 전승요소가 짙게 영향을 끼친 것으로 생각되나 그 경로는 어느것이든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비슷하게 연극적 요소(특히 서사적 성격)까 많은 판소리도 그 성립 경위는 뚜렷하지 않다.
이 밖에 사당패 등 유랑예인(流浪藝人) 집단에 의한 꼭두각시놀음(인형극)이 명맥을 유지해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전통연극의 여러 형태는 조선시대의 종식과 더불어 소멸의 길을 걷게 되었고 신문화의 도입과 함께 신연극(新演劇)이 시작되었다. 그 시기를 1908년의 원각사(圓覺社) 개설로 보는 것이 통설이나 신연극이 서구 근대극의 영향 아래 어느만큼 정착되는 데에는 상당한 시일이 필요하였다. 신연극의 형식을 일본에서 도입하지 않을 수 없었던 당시의 상황 때문에 ‘신파(新派)’라는 대중적 전시대(前時代) 연극이 먼저 자리를 잡고(1910년대), 그 뒤에야 비로소 ‘신극(新劇)’이 도입될 수 있었다. 그 시기를 대체로 토월회(土月會) 창설(1923)로 보며 극예술협회(劇藝術協會)의 발족(31) 이후 본격화되었다고 보는 것이 또한 통설이다. 한편, 같은 시기에 직업적 대중극단이 ‘고등신파(高等新派)’라는 이름 아래 연극의 대중적 기반을 넓힌 것은 신극운동의 실천가가 주로 서구극 도입을 통해 연극의식의 근대화를 도모하는 데 열중한 것과 대조적이었다. 그러나 1940년을 전후하여 일제의 가혹한 문화탄압은 연극을 어용화(御用化)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8·15광복과 더불어 비로소 한국연극은 생기를 되찾게 되었다. 광복 이후의 연극은 6·25전쟁까지의 좌우대립에서 빚어진 혼란이 적지않은 영향을 끼쳤으며, 50년대에 겨우 발전의 실마리를 잡고 극단 ‘신협(新協)’이 중심이 된 재건·정비기를 맞이하였다. 60년 이후 재능 있는 신인들의 참여를 얻어 세대교체를 실현한 한국연극은 극단활동·극장시설·극작가 배출·비평활동·인재양성 등 여러 면에서 도약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키워드

한국연극,   발전,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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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2.12.19
  • 저작시기2002.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15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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