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청 시대의 국가권력과 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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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명.청 시대의 국가권력과 신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 언

Ⅱ. 신사층의 형성
1. 학위소지자의 출현
2. 학위소지자의 계층적 고정화
3. 신사층의 성립

Ⅲ. 명대의 국가권력과 신사
1. 원말·명초 동난기의 지배층과 주원장집단
2. 중기 이후의 사회변화와 신사
3. 신사의 사회경제적 역할

Ⅳ. 청대의 국가권력과 신사
1. 명말·청초 동난기의 신사와 청군
2. 청조권력과 신사

Ⅴ. 결 논

본문내용

의 강기간의 사회안정에 기여하였다. 하지만 18세기말부터 정치질서가 해이해지고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 경지개간의 부진, 신사의 격증 등 혼란해진 사회분위기 속에서 대규모의 반란이 일어나게 되어 원말의 상황과 유사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정치·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신사층이 원왕조의 해체를 돋구었던 것과 달리, 그들의 특권과 지위를 인정해 주는 청조에 협조해 반란을 진압하는데 앞장섰으며, 19세기 중엽 太平天國運動의 진압의 계기를 만들기도 하였다.
Ⅴ. 結 論
국가의 제도적 장치를 매개로 명초부터 실질적으로 사회에 존재했던 신사층이 사회적 계층으로 성립된 것은 15세기 중엽이었다. 관직경력자인 '紳'층과 미입사 학위소지자였던 '士'층은 국가권력과 평민들로부터 '紳士' 혹은 '士紳'이라 불리었고 민을 넓은 의미로 구분할 때는 士大夫와 齊民으로 구분하였다. 이들은 강한 동류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향촌사회에서는 그들을 중심으로'鄕紳公義'가 이뤄졌다.
명·청시대에 걸쳐 중국은 사회·경제적으로 규모가 방대해지고 다양해진 반면, 관인의 수는 항상 한정되어 있었다. 때문에 향촌사회의 질서유지를 위해서 관치행정의 보조수단으로 명·청 정부는 신사를 택하였다. 평민의 입장에서 역시 국가권력의 지방통치에서 생기는 공백을 신사층의 지배력을 통해 의지했다. 다시말해 명 중기부터 청말까지 신사층은 국가권력과 평민의 공통된 기대속에서 신사가 사대부적인 공의식을 통해 사회질서와 스스로의 안정을 유지시켜 나갔다. 결국 신사는 관부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여 향촌에 대한 국가통치의 보좌역으로 그 역할을 했으며, 향촌사회에 대해서는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켜 지배력을 유지·확대해 나가면서 국가권력에 대해 향촌여론의 대변자의 역할을 수행하거나 국가권력과 향촌이해의 조정자 역할을 담당 하였다. 하지만 신사는 그와같은 역할 들을 통해 사적으로 개인의 이익을 보호하고, 사리추구의 행동을 합리화 시켜나갔다. 그리고 이상의 역할을 담당한 유교적 지식인으로 사회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던 신사층은 송대로부터 청말까지 계속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관직경력자에 한정되었던 송대의 신사층과 분리해, 명·청시대의 신사층은 생각해 볼 수 있다. 명·청시대의 신사층은 송대와 지방 근거성의 유무 혹은 강약에 상당한 차이가 있으며, 국가에서 보장한 특권 사여 대상자 수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송대에 비해 훨씬 다양화, 광범위한 사회·경제적 역할을 수행하여 국가통치의 핵심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한편 사회 다방면에 걸친 신사층의 역할에 대한 사례연구가 더욱 진전되어야 하며, 신사의 존재형태 이해를 위한 중국의 전통적 가족·종족제도에 대한 연구, 향촌사회의 실상 혹은 지방행정의 실상을 이해하기 위한 胥吏와 無賴層에 대한 연구가 필수 과제로 남아 있다.
<참고 문헌>
·서울대학교동양사학연구실, 『講座 中國史 Ⅳ』-「帝國秩序의 完成」, 지식산업사, 1989
·閔斗基, 『中國近代史硏究』-「紳士層의 思想과 行動」, 一潮閣, 1973
·鄭誠一 譯, 『아시아 歷史와 文化 4』, 신서원,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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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7페이지
  • 등록일2003.10.16
  • 저작시기2003.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26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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