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교의 성립과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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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서론

Ⅱ.향교의 성립과 발전

Ⅲ.향교의 운영
1.시설과 재원
2.교수와 생도

Ⅳ.향교의 기능
1.향리층의 신분상승과 신진사류의 형성
2. 주자학의 지방보급과 신왕조 개창의 사상적 기반 확대

Ⅴ.결론

본문내용

배를 당하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高麗後期 鄕校가 향리층의 활발한 신분상승에 필요한 科擧의 준비교육의 기능을 수행하여 新進士類의 形成에 그 역할을 담당하였지만 新官人層 스스로가 더 이상의 상승을 봉쇄하게 됨으로써 상승의 기회를 갖지 못한 신분층은 사실상 身分下降을 당하게 된 셈이었다. 따라서 朝鮮의 建國者들은 이미 상승한 신분층에 대하여는 兩班官僚로 재편성 包客하고 상승치 못한 나머지를 庶人化시키려는 노력까지 기울이게 되어, 高麗後期는 制限된 身分流動의 한 형태로 남게 되는 것이다.
2. 朱子學의 地方普及과 新王朝 開創의 思想的 基盤 擴大
高麗는 性理學의 수용과 矛盾의 打破에 앞장섰던 계층은 바로 新進士大夫들이었다. 그들은 性理學의 기본서인 四書를 科擧의 出題 과목으로 채택하고 국학에 五經四書를 중심으로 한 9齊를 설치하는 한편 지방의 향교에도 前代의 訶章를 不許하고 四書五經을 낭독하도록 하는 경학중심의 교육을 강조하므로 써 性理學의 地方普及을 꾀하였다. 鄕校를 통한 性理學의 地方普及과 지방 향리층의 신분상승 그리고 新進士類의 形成과 사회 비판과 개혁을 통한 高麗末期 鄕校 得興에 대한 諸措置등 일련의 상황은 결국 敎育·學問·政治라는 하나의 循環體制를 형성하게 됨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性理學의 지방보급은 향리층의 과다한 중앙진출로 品官이 확대되어 新官人層 스스로에 의한 統制가 취해졌음에도 불구하고 地方官學에 대한 지속적인 강조로 朝鮮初 까지 이어졌다. 그것은 곧 地方官學에서의 교육이 官人選拔의 목적 이외에도 지방민의 儒敎的 敎化에 관심을 두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특히 朝鮮初期에는 새로운 支配體制가 성립되면서 그 지배계층이 스스로를 擁護하는 입장을 고수하는 특유의 保守性과 及動性을 나타내어
金哲埈, 「韓國文化史論」, 知識産業社, 1979, 103쪽.
신진사대부들은 자신들의 지배이념인 性理學의 廓大·普及에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麗末의 鄕校를 부흥시키려는 일련의 조처는 고려향교를 다시 진흥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도 있으나 한편으로는 新進士大夫들이 未久에 開創될 새 왕조의 정치적 이념인 性理學을 京外의 교육을 통하여 普及·廓大 시킴으로써 새 왕조 開倉을 위한 기반을 확대시키는데는 간접적이면서도 큰 영향을 끼치게되었다. 정몽주와 같이 王朝交替에 반대한 사람도 있겠으나 그 역시 당시의 사회개혁 방법으로 時俗의 喪祭를 朱子家禮에 따라 家廟를 세워 儒敎儀式으로 할 것을 주장하였고 그러한 性理學者들의 사회개혁에 관한 논의는 王朝의 교체와 관계없이 朝鮮初에 이르러 더욱더 적극성을 띠게된다. 그러므로 性理學의 普及을 위하여 官學의 儒敎敎育이 강화되고 그 이로한으로 鄕校敎育이 크게 장려되었던 점은 高麗末期의 현상과 분리해서 생각 할 수 없는 것이라 본다. 그러므로 비록 非意圖的이었다 하더라도 高麗後期 京外의 교육을 통한 性理學의 普及은 儒敎的 질서체계를 정립하려는 新進士類 중심의 새 王朝 開創에 그 사상적 기반을 확대시키는 데 寄興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 것이다.
고려에서 수입한 성리학은 性理學一殿이 아니라 中國性理學의 한 學派인 朱子學이다. 주자학은 南宋(1127-1279) 中葉에 가서야 이루어진 학설이다. 이는 고려 쪽에서 볼 때 武人執政期로써 高麗儒學이 암흑기에 들어가 있을 때요, 또한 遼·金의 强盛으로 南宋과의 交涉이 침체상태에 처해 있을 때이다. 이로써 高麗의 朱子學은 南宋에 의해 高麗에 전파되지 못하고 元으로부터 忠熱王代에 수입되었다. 그것은 당시의 元이 性理學중에서 유독 朱子學만을 官學으로 取擇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元으로부터 그러한 朱子學을 수입해 옴으로써 高麗는 물론이후의 朝鮮에 들어와서도 朱子學만을 官學으로 信奉하는 추세였다. 이러한 주자학이 麗末鮮初 新進士類에 의해 적극적으로 信奉되고 그것의 地方普及에 鄕校가 이용되었음은 바로 學問의 多樣化를 구속하는 逆機能에 一助한 不可避性을 나타내는 것으로 制度史의 단면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Ⅴ.결론
지금 까지 高麗時代의 鄕校에 대해 적게나마 그 存在에 대하여 알아 보았다.
高麗時代의 鄕校는 武臣政權의 등장을 중심으로 前後期로 나눌수 있다, 前期는 成宗으로부터 睿宗까지로, 성종 6년(987) 12牧 儒學敎授를 파견하면서 設置되기 시작한 鄕校는 文宗代에 와서는 교수가 파견되는 등 刮目할 반전을 하여 大擧進出하는 鄕貢들을 統制하지 않으면 안되게까지 이르렀다. 그 후 睿宗代에는 지력관중 科擧身者는 學書를 주력케 함으로써 鄕校敎育이 보다 組織的으로 운영되어 전국적으로 普及되었고, 仁宗代에는 주군현에 상당수의 鄕校가 設置되거나 재정비 되어 전국 규모로 발전하여 지방 관학의 完成期에 이르렀다.
후기는 다시 武臣執權期와 蒙古干涉期이후부터 高麗末까지로 나눌 수 있는데 高麗王朝는 武臣政權이 등장하면서 심한 動搖를 일으켰고 地方敎育 또한 큰 타격을 받았다. 많은 무신들이 禍를 당하거나 산 속으로 피하는 형편이었으나, 중앙에서 지방교육에 관심을 둘 여유가 없었다. 그리하여 이시기는 지방교육의 발전이 아니라 그 시설마저 황폐화해 가는 시기였다.
그 후 蒙古干涉期로 접어들면서 內憂外患이 어느 정도 終患되고 社會도 다시 安定을 되찾자 敎育에 눈을 돌리게 되어 중앙에서는 國學과 私學이 復興하고 地方에는 교육에 관심 있는 文臣守令들에 의해 오랫동안 폐지되었던 향교가 되살아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향교자체의 복구·중수에 비하여 중앙으로부터의 교수 파견은 그리 원활치 못하였다. 그리하여 수령이 직접 교육을 담당하거나 僧侶나 儒師등을 시켜 鄕校敎育을 맡기는 등 지방 자체에서의 해결양상을 나타났으며, 제도적인 교수관의 파견은 恭讓王代에야 와서 이루어졌다.
이러한 향교는 후기에 들어 朱子學의 도입과 경학중심으로 변모하는 과거 출제경향을 받아 사서오경이 중요시되었다. 또한 후기 향교는 地方敎育이라는 인재양성의 한 수단으로도 기능 하였지만 왕권강화에 수반된 地方統制의 강화에 따라 향리층으로 전락한 지방세력의 측에서 보면 중앙진출의 자격획득을 위한 媒體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것은 향리층의 신분상승과 신진사료를 형성에 기여한 것이다. 또한 향교는 朱子學의 地方普及과 新王朝 開創의 思想的 基盤을 擴大하는데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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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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