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현대사 요약 - 5.4운동이후 홍콩반환까지
본 자료는 4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해당 자료는 4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4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본문내용

가 정비된 중국은 심천(深川)·주해(珠海)·아모이(廈門) 등의 경제특구의 건설에 주력하고 연해지구 14개 도시의 대외 개방을 실시하여 서방세계와의 교류를 확대하고 4개 현대화노선을 적극 추진하였다. 그러는 과정에서 1984년 9월에는 영국과 의 홍콩반환교섭에 의한 공동선언에 성공하여 홍콩을 영국의 조차기간이 끝나는 97년 7월 1 일을 기해 중국에 반납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와 함께 홍콩의 장래에 대해서 ‘1국가 2체 제’라고 하는 사회주의 하에서 자본주의체제를 용인하는 독특한 운영체제를 선언하였다. 이는 결국 대만에 대한 압력으로 작용하였는데 중국의 대만에 대한 통일 또는 제3차 국공합작이라는 형식을 홍콩과 같이 1국가 2체제의 형태로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대만의 이등휘(李登輝) 정부는 이에 반발하여 소위‘1국가 2정부론’을 제기하였다.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중국의 정치무대에 큰 변화가 있었는데, 1987년 1월 16일 호요 방 총서기의 해임과 같은 해 10월 개최된 중공 13전회에서의 조자양의 총서기 선임이다. 개혁과 개방의 추진자인 호요방의 해임은 개혁과 개방정책이 10년을 맞이하는 시점에서 그간의 자본주의적인 부작용, 즉 배금주의(向錢看) 풍조의 만연이라든가 만원호(萬元戶)의 등장에 따른 빈부의 격차의 심화 등의 사정을 들어 개혁정책에 견제해온 보수·원칙주의자들의 불만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미 1987년 1월 1일부터 실시된 중화인민공화국 토지관리법의 시행은 실질적으로 토지사유화의 계기가 되었다. 또 한 가지 호요방의 실각 원인으로서 지적되는 것으로 그가 주장한 젊은 세대로의 세대교체론의 주장이었다. 그가 주장한 중앙위원회 의 젊은 인재 등용론의 주장은 결국 등소평에 대한 퇴진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는 이야기다. 이렇게 하여 호요방 해임 이후의 중앙의 권력 구조는 여전히 등소평을 정점으 로 하여 개혁파에 조자양·호계립(胡啓立)이 있고, 보수·원칙파에 이붕(李鵬)·요의림(姚依 林), 그리고 중간파적인 위치에 교석(喬石)이 포진하는 형태가 되었다. 1989년이 시작되자 중국 내에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각계로부터의 공개서한이 발표되었다. 문화계 인사 43인의 공개서한, 또한 북경문화인 33인의 서한 등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한편으로는 78년 북경의 봄의 지도자 위경생의 석방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 해는 중국 건국 40 주년, 5·4운동 70주년, 그리고 프랑스혁명 200주년에 해당하는 해로서 인권존중·민주주의를 요구하는 활동이 활발했다. 그러는 가운데 4월15일 호요방이 사망했다. 이를 계기로 하여 4월 18일부터는 북경의 대학생들에 의해 천안문광장의 인민영웅기념비에 호요방 추도 헌화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학생들의 활동이 결국 4월 20일에는 이를 저지하는 경찰과 충돌하여 유혈사태로 발전하였고, 이를 계기로 점차 활동이 증폭되어 학생들의 자주조직인 북경시학 생자치연합회가 천안문광장에서 창립되었다. 이들은 호요방의 재평가·명예회복, 언론 보도 의 자유 등 각종 민주화 조치를 요구하였다. 이러한 학생들의 활동에 대하여 등소평은 ‘동 란(動亂)’이라고 규정하고 적극적인 진압의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학생들의 집회는 5월 4 일 청년절을 경과하면서 더욱 격렬해졌으며, 5월 13일부터는 단식농성이 시작되었다.
5월 15일부터는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의 중국방문이 예정되어 있었다. 이 소련원수의 중 국 방문은 30년 만에 이루어지는 것으로서 이미 세계의 매스컴이 주목하고 각 국의 기자들이 북경에 들어와 있는 상황이었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도 이러한 상황을 충분히 이용하려 하였다. 고르바초프의 북경방문 기간 중에는 천안문광장에 모인 학생과 시민의 수가 100 만을 넘어섰다. 5월 18일 이붕 총리는 인민대회당에서 당시 북경대학생 왕단(王丹)등의 학생 대표단과 회견했으나 결렬되었다. 5월 20일에는 북경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그러나 학생들 의 농성은 계속되었고 6월 4일 새벽 인민해방군은 전차와 장갑차를 앞세우고 농성학생들에 게 발포하였다. 이 천안문 사건에 대한 피해의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다. 대체로 2000여 명의 사망, 1만 여명이 부상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학생운동에 동정을 표했던 조자양 총서기는 해 임되고 이어 강택민(江澤民) 당시 상해시장이 당총서기에 오르게 되었다. 고르바초프 소련대 통령이 북경에서의 공식방문을 마치고 5월 20일 상해에 갔었는데, 이를 맞이한 사람이 강택민 당시 상해 시장이었다. 천안문 광장에서의 유혈사태는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중국이 그간 개방과 개혁정책을 추진하여 서방의 각 국으로부터 상당한 신뢰를 쌓아왔던 터여서 더욱 그러했다. 또한 충격을 더욱 직접적으로 받은 사람들은 홍콩인들이었다. 이미 중국에 반환교섭이 끝난 상황에서 자 신들의 장래의 운명이 걸려있기 때문이다. 홍콩·대만 등지를 비롯하여 세계 각지에서 유혈진압에 대한 규탄대회가 계속되었고 서방 각 국은 중국에 대한 경제지원을 중지하기도 하였다. 1990년 1월 11일 북경의 계엄령이 해제되고 천안문사태의 충격이 진정되어 가는 가운데 1992년 8월 24일 우리나라는 중국과 국교정상화를 실현하였다. 1997년 1월 19일 등소평은 자신이 정력적으로 추진했던 홍콩반환을 목전에 둔 채 세상을 떴다. 그리고 1997년 7월 1일 역사적인 홍콩영토의 반환행사가 전 세계에 텔레비전 중계되는 가운데 거행되었다. 초대 홍콩특별행정부 장관에는 동건화(퉁첸화, 董建華)가 임명되었다. 단상에 장식된 대형 그림 속에는 등소평의 얼굴이 그 중앙을 차지하고 있었다. 1999년에는 마카오의 반환도 이미 결정된 상태여서 19세기이래 반제국주의 노선을 견지해온 중국으로서는 그 마지막 식민지를 탈환하여 명실공히 그 노선의 성공을 구가하려 하고 있다.
참고문헌
* 페어뱅크 외 공저(김한규 외 역), {동양문화사}(하), 을유문화 사,1991.
* 신승하, {중국근대사}, 대명출판사,1990.
* 루시앵 비앙코(이윤재역), {현대중국의 기원}, 종로서적,1985.
중국 현대사
- 5.4운동이후 홍콩반환까지의 중국 현대사의 흐름 -
과목명 :
학 부 :
학 번 :
이 름 :

키워드

  • 가격2,000
  • 페이지수12페이지
  • 등록일2003.12.06
  • 저작시기2003.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36751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