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에 있어서의 호족의 이해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차

1. 머리말

2. 호족이라는 용어의 의미 범주

3. 호족연합정권설

4. 호족 세력의 등장과 존재 형태

5. 호족 세력과 국왕간의 정치적 관계, ‘귀부’

6. 호족 세력과 결합한 여타 세력

7. 호족 세력과 신라 및 후삼국과의 관계

8. 고려초기 호족 세력의 정치적 편제

9. 맺음말

본문내용

치 관계로 볼 수 있다면, 또한 호족의 선택권과 동시에 국왕의 결정권이 양자간의 정치적 관계 맺음에 작용하고 있었다면, 나말여초의 호족 세력과 국왕의 관계에서 국왕이 호족 세력에 비해 실질적인 우위를 점유하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호족의 등장과 존재형태는 신라말기, 골품체제의 폐단이 야기한 사회의 구조적 모순 속에서 정치적 동향의 중심에 있었던 호족 세력들의 다양한 사회 참여 계기와 향후의 행동 방향을 정리하는데 중요한 척도이다. 따라서 그들의 출신을 유형화한 낙향 귀족 세력, 군진 세력, 해상 세력, 촌주 세력 등의 기준이 엄격하게 검토되어야하고 사료에 나타난 장군, 성주, 적사, 호족 등 史實의 표현과 종합적으로 논의되어야 한다.
귀부는 호족연합정권설의 핵심 논지로 그 실상은 나말여초 국왕 및 유력 세력과 기타 호족과의 정치적 관계가 어느 한 세력의 전적인 주도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호족 세력과 국왕은 혼인이나 기인제, 사성 등의 귀부 형식을 통하여 정치적 공조를 합의하는데 이 과정에는 호혜적·상호의존적 원칙이 전제되어 있었다. 귀부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호족의 선택과 국왕의 결정, 양자의 이해 관계가 합치되어야 했다. 또한 특정 귀부 주체와 귀부가 이루어진 시점이나 상황을 종합해서 고려한다면 해당 호족 세력의 정치적 지향점도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신라말기 호족 세력과 6두품 출신 세력, 선종 세력간에는 공히 사회 구조적 모순으로 야기된 사회적 지위의 격하로 인한 정서적 공감대가 형성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들간의 결합을 논의하고자 한다면 논의의 출발점은 정서적 공감과 관련된 사료 검토에서 비롯되어야 하고, 사회적 문제, 사상적 문제로 논의를 확대해야한다. 특히 사상적 접근은 사상 자체의 표면적 성격에 몰두해서는 안된다. 적어도 약식화 혹은 핵심화된 사상의 표면적 성격의 설정 과정을 엄격하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에서는 선종이 지닌 개별성과 호족 세력이 지닌 개별성을 연관지어 생각해보았다.
처음부터 호족 세력들이 전면적으로 신라와 신라 중앙 정부를 부정했다고는 판단하지 않는다. 사례의 편린에 지나지 않겠으나 글에서는 견훤의 사례를 들었다. 아마도 신라 부정의 정점은 호족 세력의 성장과 신라의 퇴락의 수준이 맞물리는 시점에서 호족 세력은 신라를 배제하고 독자적인 지배력을 유지해 나갔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호족은 연합 혹은 정복의 논리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고 보여진다. 궁예·견훤과 호족 세력과의 관계와 왕건과 호족과의 관계를 상호 고려하면서 단기간의 세력화와 장기적인 세력화의 결과를 비교해보고 언제라도 분리될 수 있는 호족 세력에 대한 왕건의 정책적 노력이 고려를 건국하게 만든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음을 살펴보았다.
고려초기 호족 세력은 강력한 왕권 강화의 의지 앞에 해체의 과정을 겪는다. 그들 앞에는 중앙과 지방이라는 두 가지의 기로가 놓여있었는데, 이는 더 이상 자신들의 선택을 바탕으로 국왕의 결정을 얻는 관계가 아니라 국왕의 결정에 자신들의 선택이 종속되어 버리는, 또한 자신의 정치적 입지와 성향이 국왕에 의해 계산되어 버리는 수준의 기로였다. 따라서 이들은 더 이상 전 시대 기준의 세력화를 도모할 수 없었고 고려라는 새로운 정치 체제에 의해 재편되고 세력은 계열의 정도로 남게되면서, 일부는 중앙에서 문벌이나 관료로 개편된 세력화를 시도하고 일부는 기존의 근거를 중심으로 지방 사회의 세력화를 시도하게 된다.
나말여초의 호족 세력은 각자의 정치적 지향점을 가지고 세력화의 장정에 뛰어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그들은 사회 전반의 조건에 의하여 연합 혹은 정복의 과정에 개입되어 최초의 정치적 지향점 역시 변화, 좌절, 성취 등의 부침에 접어들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부침이 곧 나말여초의 사회변동이었다. 그들 호족 세력은 나말여초의 사회 변동을 주도한 세력이었다. 호족 세력의 존재 의의는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입장에 따라서는 상대적이기는 하나 퇴락한 신라를 꺾고 새로운 고려를 세우는 그 일선에 호족이 있었던 것이다.
■ 참 고 문 헌 ■
金甲童, 1988, 「高麗初期 官階의 成立과 그 意義」『歷史學報』117, 歷史學會.
김갑동, 1994, 「고려 전기 정치체제의 성립과 구조」『한국사』5, 한길사.
金光洙, 1979, 「羅末麗初의 豪族과 관반」『韓國史硏究』23, 韓國史硏究會.
金相 , 1996, 「新羅末 舊加耶圈의 金海 豪族勢力」『震檀學報』82, 震檀學會.
金周成, 1988, 「高麗初 淸州地方의 豪族」『韓國史硏究』61·62, 韓國史硏究會.
노시백, 1985, 「後三國期 豪族의 存在形態」, 연세대석사학위논문.
朴龍雲, 1990, 『高麗時代史』(上), 一志社.
朴菖熙, 1984, 「高麗初期 '豪族聯合政權'說에 대한 檢討-'歸附'豪族의 정치적 성격을
중심으로」『韓國史의 視角』, 永言文化社.
朴漢卨, 1987, 「王權과 豪族」『韓國史硏究入門』, 知識産業社.
申虎澈, 1993, 「後三國時代 豪族聯合政治」『韓國史上의 政治形態』, 一潮閣.
申瀅植, 1985, 「豪族 의 歷史的 性格」『新羅史』, 이대출판부.
嚴成鎔, 1986, 「高麗初期 王權과 地方豪族의 身分變化-豪族聯合政權說에 대한 검토」
『高麗史의 諸問題』, 三英社.
兪炳基, 1984, 「高麗初 豪族의 動向과 王權强化策-光宗의 王權强化策을 中心으로」
『全州史學』1, 全州史學會.
尹京鎭, 2001, 「나말여초 성주(城主)의 존재양태와 고려의 대성주정책」『역사와 현실』40.
윤경진, 2002, 「고려초기의 정치체제와 호족연합정권설」『한국 전근대사의 주요 쟁점』,
역사비평사.
李基白, 1977, 「高麗貴族社會의 成立 槪要」『한국사』4, 국사편찬위원회.
李純根, 1991, 「羅末麗初 豪族 용어에 대한 연구사적 검토」『聖心女大論文集』19.
李純根, 1992, 「新羅末 地方勢力의 構成에 관한 硏究」, 서울대박사학위논문.
鄭淸柱, 1986, 「弓裔와 豪族政治」『全北史學』10, 全北大學校史學會.
崔柄憲, 1986, 「羅末麗初 禪宗의 社會的性格」『韓國佛敎禪門의 形成史的 硏究』, 民族社.
河鉉綱, 1977, 「高麗王朝의 成立과 豪族聯合政權」『한국사』4, 국사편찬위원회

키워드

  • 가격2,000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03.12.06
  • 저작시기2003.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36770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