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궁궐 문화의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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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머 릿 말

2. 경복궁 건축물

3. 맺 음 말

본문내용

로 구름다리를 걸어 취향교(醉香橋)라 하였다. 향원정은 보통 이층이라 하지만 누마루 밑의 구조까지 치면 삼층이 된다. 지금은 남쪽에서 나무다리를 건너서 섬에 가게 되어 있지만, 옛날엔 이 다리가 북쪽에 있어 건청궁쪽에서 건널 수 있게 되었었다.
향원지와 취향교
경복궁의 후원에 속하는 향원지는 세조 2년(1456)에 조성되어 취로정(翠露亭)이란 정사를 짓고 연꽃을 심었다는 기록이 「세조실록」에 보인다. 못의 넓이는 4,605평방미터이며, 모를 둥글게 죽인 방형의 연지에는 연꽃과 수초가 자라고, 잉어 등 물고기가 살고 있다. 연못가에는 느티나무, 회화나무, 단풍나무, 소나무, 굴참나무, 배나무, 산사나무, 서어나무, 버드나무, 느릅나무, 말채나무가 숲을 이루고, 향원정이 있는 섬에는 철쭉, 단풍 등 관목류가 심어졌다. 이 연못 남쪽의 함화당 후원에는 '하지(荷池)'라 새긴 석지와 석상(石床)이 배치되어 있다. 이 연못의 수원은 북쪽 언덕 밑에서 솟아나는 지하수와 '열상진원'이란 샘물이다. 연지 속에 북악의 산영이 잠겨들고 오색 아롱진 단청의 정자와 취향교가 그림자를 드리우면 한폭의 그림같이 아름답다. 취향교는 목교로서 1873년에 설치되었다. 원래는 건청궁에서 향원정으로 들어가도록 북쪽에 있었던 다리인데, 1953년 남쪽으로 옮겨 놓았다. 조선시대 원지에 놓인 목교로는 가장 긴 다리이다. (길이 32미터, 폭 165센티미터)
20. 명성황후 시해 당한 장소
청일전쟁이 끝난후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일본세력을 배척하자 고종 32년(1895) 10월 8일 일본공사 미우라의 사주를 받은 일인(日人) 자객들이 경복궁에 침입하여 경복궁 후원 옥호루(玉壺樓)에서 명성황후와 많은 상궁을 살해하였다. 명성황후라는 시호(諡號)는 광무원년(1897)에 추증(追贈)되었으며 처음 남청량리에 장사(葬事)하였다가 1919년 고종황제가 승하하자 홍릉(洪陵, 경기도 금곡)에 이장하였다. 사진의 비석(碑石)은 1981년 11월 명성황후 순국숭모비건립위원회에서 명성황후의 순국을 애도하여 경복궁내의 명성황후가 시해된 장소에 세운 것이다.
21. 집옥재
고종 10년(1873)에 건청궁(乾淸宮)을 지을 때 함께 창건한 건물로 추정된다.지금의 자리로 이전된 것은 고종 28년(1891)7월 이후였고,고종 30년엔 집옥재에서 각국의 사신들을 접견한 바 있다. 집옥재는 높은 댓돌에 큼직한 삼구의 석계를 설치하고, 그 위에 한단을 더 설치하여 고형(鼓形)주초석에 둥근 두리기둥을 세웠다. 평면은 20간이고 집은 맞배지붕형이며 좌우 박공 아랫벽은 전(塼)으로 초담을 쌓았다. 마치 중국집의 구조와 같은 벽돌담이다.
22. 신무문
경복궁의 북문으로 고종 2년(1865) 중건 되었다. 항시 닫아 두었다가 왕이 어원에 거동할 때나 특별한 경우에만 열었다 하는데 6.25동란 때 문루의 일부가 파손되어 보수 하였으며 <고종실록>에 의하면 현판 서사관(書寫官)은 이현직(李顯稷)이라한다. 단간의 홍예문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문루를 세웠으며 2익공 양식에 우진각 지붕으로 되었다. 문헌에 의하면 건춘문.영추문.신무문은 그 홍예의 높이와 폭, 문루의 평면과 주칸 등이 모두 같은 규모로 되어 있어 정문인 중층의 광화문을 제외하고는 이들 세 문은 모두 규모나 가구.구조수법(架構.構造) 등을 같게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맺음말>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느끼고, 느끼는 만큼 사랑한다..
이번 경복궁을 답사하면서 이 말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던 이유는 무엇 떠문일까?...
몰랐던 사실들을 하나 둘씩 알아가고 그것들을 통해 새로운 시각으로 다시 유적을 바라보았을 때 느꼈던 감동이란....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이 즐겁고 뜻깊었던 것 같다
그리고 제일 처음 반겼주었던 총독부 건물로 인해서 일본인 손에 헐려야만 했고 6.25때 잿더미로 변해버리는 역사적 시련을 겪어야 했던 광화문과 임진왜란때 불에타버린 경회루의 48개의 돌기둥을 비롯하여 여러가지 건축물들이 성한것이 하나도 없었다는것이 지난 날의 우리 문화재에 대한 무관심과 무지가 안타깝고 부끄러웠으며
점점 고쳐나가고 새로 짓고 하는 자세는 바람직하지만 옛 선조들의 지혜와 기술과 멋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이번답사는 정말 국사 교과서를 10읽어본 효과보다 더 좋은 결과가있었던거 갔았다.
이제 외국인에게 경복궁에 대한 질문을 받아도 뭐든지 척척설명해 줄 자신과 지식이 싸였다.
마지막으로 이 과제를 내주신 교수님께 감사합니다.
  • 가격1,000
  • 페이지수9페이지
  • 등록일2003.12.06
  • 저작시기2003.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36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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