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정부(제2공화국)하의 헌법기본구조과 법률제도분석
본 자료는 4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해당 자료는 4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4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차

서론

본론
Ⅰ.장면정권(제2공화국)의 헌법의 기본구조
1.기본권 보장의 강화
2.국가권력기구의 개편
Ⅱ.장면 정부 하의 정당구도 분석
1.민주당의 집권과 분열
(1)과도 정부 출범과 내각제 개헌
(2) 신·구파의 대립과 7·29선거
(3)총리지명과 신민당의 창당
2.혁신진영의 활동
(1) 7·29선거 이전
(2) 7·29선거 이후
3.정당구도의 붕괴와 각 정치세력의 입장
(1)신파의 입장
(2)구파의 입장
(3)혁신계의 입장

결론

본문내용

권하지 9개월만에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군부는 장면 정권 인수를 선언한 군사혁명위원회는 포고 제 4호를 통해 모든 정당과 사회 단체의 정치활동을 금지시킴으로써 1948년 8월 15일의 정부수립이후 '위기와 통합'의 틀 내에서 결성되었던 자유당과 민주당을 비롯하여 혁신세력까지 포함, 이합집산을 반복하던 정당구도는 단번에 붕괴되고 말았다.
쿠데타 세력은 용공세력의 대두·경제적 위기·고질화된 정치풍토·사회적 혼란·국민도의의 퇴폐 등을 들며 '군사혁명의 필연성'을 역설하였다. 이와 같은 주장은 어느 정도 공감대가 형성되었으나 정치권에선 그 견해가 달랐는데 이는 신파와 구파, 그리고 혁신계의 의견이 달랐기 때문이며 당시 각 정치세력들이 자신들이 처한 입장에서 정세를 분석했기 때문이다.
(1)신파의 입장
장면 정권은 쿠데타가 일어난 원인을 민주당 정권의 과오 때문이 아니라 야심을 가진 군 부를 너무 믿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고 아울러 윤대통령을 비롯한 구파측에서 쿠데타를 진압할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고 쿠데타에 동조했다고 생각하였다. 신파측은 쿠데타세력 과 구파를 연결시키고 구파의 불협조로 인해 자신들의 성의가 결실을 보지 못했다고 주장 하였다. 즉 구파가 탈당하여 민주당이 분열되어 정국이 혼란스러워져 쿠데타의 빌미를 제 공하였고, 또 대통령이 이에 동조함으로써 정권이 붕괴되었다는 인식이었다. 그러나 신파측 도 지나친 낙관으로 통합을 무시한 채 약체내각을 이루어 위기 극복의 리더쉽을 발휘하지 못한 것이 정권의 붕괴를 자초한 것이다.
(2)구파의 입장
구파의 입장은 쿠데타 발발의 직접적인 원인을 장면 정권의 무능과 내분 때문이라고 보았 으며 장면정권의 기초가 박약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구파가 분 당하여 야당의 길을 걸음으로써 오히려 충실한 보수 양당체제를 구축하여 헌정에 이바지하 였다고 반박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의 연장선상에서 장면 정권이 대내외 제반 정책의 수립에 정책적 빈곤을 나타냈고, 정실인사로 정치적 부패를 초래했고, 확고한 목표가 없어 서 무능했기 때문에 용공세력이 팽창하여 정치적 위기가 조성되었으며 정권 교체를 바라는 여론이 높아 갔다고 주장하며 군부의 쿠데타 필연성과 의견을 같이하였다.
그러나 윤대통령의 하야 선언 반복에 대해선 윤대통령의 유임으로 인해 정국이 그나마 안 정해 질 수 있었다는 긍정적 평가와 "하야성명을 내고도 군인들이 만류하니까 못이긴 듯이 눌러 앉아 있다가 결국은 자기의 동지들을 제재하는 법에 찬성" 하였다고 부정적 평가가 나오기도 하였다.
(3)혁신계의 입장
혁신계는 5·16이 양파가 모두 기본적으로 정국을 잘못 이끌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보았다. 또한 민주당의 비대화와는 달리 경륜의 부족 그리고 미국의 개입을 원인이라고 주 장하였다. 그리고 5·16 군사 혁명에 대해선 자신들과 같은 혁신정치가 출현한 것이라고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으나 후에 혁신당의 탄압으로 부정적으로 바뀌게된다.
결론
우리는 이상에서 장면 정권의 법률 제도적 어프로치로써 장면 정권 하의 헌법구조와 정당구조를 살펴보았다. 살펴본 제 2공화국체제의 제도화 여부는 한국민주주의의 성패를 판가름하는 試金石(시금석)이었다. 그러나 그 동안 이승만 정권에 의해 짓눌렸던 국민들의 참여욕구가 무분별하게 이 시기에 분출함으로써 2공화국체제는 투입과잉에 따른 體制荷重(체제하중)을 감당하지 못하고 1년도 못되어 붕괴하고 말았다. 말할 것도 없이 하나의 공화국이 지속적으로 존속하려면 안정을 유지해야 하며 그것은 체제의 갈등해소능력을 전제로 한다. 논리상 국민들의 욕구분출은 활발한데 체제가 갈등해소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사회혼란과 정치불안이 격화되기 쉬운 것이다. 장면체제의 평형상실과 붕괴도 마찬가지였다. 4.19의 여세로 각계의 욕구분출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폭발함으로써 장면정권은 갈등해소기능을 상실하게 되었고 결국 붕괴하고만 만 것이다. 장면정권의 몰락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1) 정치권력(집단세력)이 정당성뿐만 아니라 효율성도 갖추어야 민주주의질서는 안정기반, 즉 제도화를 이룩할 수 있다는 점이다.
2) 체제가 효율성과 안정성을 제고하려면 집권엘리트가 과업능력을 갖추어야 하며 무엇보 다. 이해조정능력과 갈등해소능력이 뛰어나야 한다는 점이다. 제2공화국의 통치엘리트는 집권경험도 전문지식도 없는 룸펜정치인이 대부분이었고 근대교육을 받은 사람은 소수 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은 과업능력 면에서 대단히 낙후되어 있었음을 유의할 필 요가 있다.
3)집권층이 파벌대립과 권력투쟁을 슬기롭게 극복하지 못하면 정국불안이 가중되기 마련 이고 대항엘리트에 의한 정권찬탈의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점이다.
사실 5.16당시 군부엘리트가 무혈쿠데타에 성공할 수 있었던 주요한 순기능 요인은 2공화국의 지도세력이 정파이기주의와 권력투쟁에 여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권력중심부가 분열되었기 때문에 장면정권은 거의 기능마비 상태에 빠졌으며 이 틈을 타고 군부세력은 5.16쿠데타를 손쉽게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다른 이유로 장면 총리의 실천성의 미비를 들 수가 있다. 제2공화국의 정치적인 임무는 한마디로 '혁명의 완성'이었다. 그러나 최고 지도자인 장면총리는 혁명실천의 의지가 미약했다. 장면정부는 과거청산과 관련된 국민들의 기대와 요구에 부응하는 적정한 조치를 과단성 있게 취하기 보다 "순수한 자유민주주의 이념에 따른 제도의 추진만이 혁명정신에 부응하는 것" 이라고 인식했다. 이러한 비혁명적 상황인식과 함께 장면총리와 민주당의원들은 경제제일주의를 내세워 정치적 비전으로 제시했다. 장면총리는 나름대로 근대화의 이상과 정책을 갖추고 있었지만 근대화 지도자로서 체제 정당화와 정권유지와 관련된 정치적 안목과 기술, 그리고 엘리트 장악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5.16을 당했고 그로 인해 제2공화국은 붕괴되었던 것이다.
〈참도 도서〉
장면정부하의 정당구도분석. 심지연. 서울대학교한국정치연구소,
1999년(제8.9 합병호)
제 2공화국헌법의 성립과 그 전개 : 그 헌법사적 평가의 한 시도.
박성빈. 중앙대학교 ,1991
비교정치론. 한배호. 법문사, 2000

키워드

  • 가격2,000
  • 페이지수14페이지
  • 등록일2003.12.22
  • 저작시기2003.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39834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