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의 영토 확장에 대한 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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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광개토대왕의 영토 확장에 대한 접근

Ⅱ. 고구려 제국 건설을 향해

Ⅲ. 강성한 고구려 제국의 건설

본문내용

치는 데 필요한 진출로를 확보한 셈이었다.
3) 경술년 동부여 정벌
' 영락 20년 410년에 동부여가 본래 추모왕의 속민이었는데 도중에 배반하여 조공하지
않으므로 태왕이 직접 정벌을 나가 여성에 이르렀더니 여성국의 해왕이 항복하므로 태왕은
용서하고 돌아왔다.
또한 고구려를 존경하여 관리를 보내어 항복한 자들이 있었으니 미구루압로, 비사마압로,
타사루압루, 숙사사압로 등이다. 이 원정에서 64성과 1400부락을 깨트렸다.'
동부여가 고구려의 속국이 된 것은 대무신왕이 동부여를 쳐서 대소왕을 살해한 이후이다.
압로의 지명은 압록강을 연상시키는데 지금의 길림시, 장춘시를 지나는 송화강도 압록강이라 부른 기록이 남아있는바, 사신을 보낸 여러 압로국들은 바로 이 압록강 유역국가로
해석되며 여성은 훈춘시 삼가자진 비우성, 즉 부여성으로 추정한다.
Ⅲ. 강성한 고구려 제국의 건설
숨가쁘게 달려온 광개토대왕의 왕성한 정복사업은 그의 재위기간인 4세기 후반과 5세기초 이르러 64성과 약 1, 400촌락을 손에 넣었으며, 우리 민족의 활동무대를 저 만주대륙 아니 중국대륙으로 뻗혀 동으로는 숙신과 동부여 서로는 후연을 넘어 북위까지 남으로는 일본 북으로는 영안에 이르는 당시 동북아 최대 강국을 건설하게 된다.
이러한 영토확장과 더불어 광개토대왕은 치정에 주력하여 장사(長史) 사마(司馬) 참군(參軍) 등의 중앙 관직을 신설하였다.
또한 태왕 및 선조 왕릉의 보호를 위한 수묘인(守墓人)제도를 재정비하였으며, 393년에는 평양에 9사(寺)를 창건하고 불교를 장려하여 평양 중흥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가 412년 39의 꽃다운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까지 나라 안팎으로 영토확장과 체제정비에 온 힘을 쏟은 결과는 5세기 후반 장수왕에 이르러 동북아 최대 강성 고구려 제국으로 나타나게 된다.
역사상 우리는 적지 않은 대왕을 겪어 보게 된다. 그러나 이 광개토대왕 만큼 접하는 내내 가슴이 상기되도록 벅찬 적이 있었던가. 다소 위축된 역사 속에 가려져 있던 우리들로서는 광개토대왕이 품은 진취적 기상과 만주대륙을 호령하던 그 높은 기지를 통해 한민족으로
하여금 다시금 그 역사적 긍지와 자부심을 고양 시키는 데에 한 치도 모자름이 없다.
역사는 되풀이 된다고 했던가. 우리가 지금은 비록 이 한반도에 국한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어제의 광개토대왕의 뜻을 오늘의 우리의 뜻으로 이어나간다면 우리는 반드시 역사의 수레바퀴에서 정상에 서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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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6페이지
  • 등록일2004.05.03
  • 저작시기2004.0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48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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