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의 사회구조와 신분제도(골품제)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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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성골과 진골

2. 골품의 신분

3. 사회생활의 제약

4. 관직상의 제약

5. 골품제의 해체 및 기타

6. 참고

본문내용

제는 각각 몇 차례에 걸친 천도로 말미암아 본래 족제적 성격이 강했던 왕도의 부족조직을 약화시키고 말았는데 ―왕도의 부족조직이 새로운 수도에 고스란히 옮겨질 수는 없는 것이며, 실제로 천도중에는 바로 이 부족조직을 약화시키기 위한 목적에서 단행된 경우가 많았다―신라만은 그 건국에서부터 멸망의 순간에 이를 때까지 수도를 옮긴 적이 없었다. 인믄 신라사의 하나의 불가사의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신라는 시종 경주를 고수함으로써 왕경의 부족조직은 이렇다 할 큰 변화를 겪지 않은 채 후대에까지 온존될 수 있었다. 다시 말하면 삼국 중 신라만이 족장층의 혈연적 유대가 한 지역에서 뿌리를 내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골품제도의 강고한 일면이 이 점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는 까닭도 이 때문이다. 사실 골품제도는 인도의 카스트제도나 일본의 씨성제도와는 달리 골품 자체가 세습적인 직업으로 분화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골품제는 그 사회적 기반이 박약하여 성골의 소멸과 더불어 붕괴되어 간다고 논하는 사람조차 있다. 어쨌든 이는 족제적인 사회체계의 성립과 유지를 위해서는 크나큰 약점이 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골품제도가 일본의 씨성제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인성을 띠게 된 요인 가운데는 왕경의 부족조직을 들 수 있다.
골품제는 신라가 성장해나가는 과정에서 성립한 역사적 산물이었다. 따라서 신라 사회가 변화함에 따라 골품제도도 끊임없이 변화했다. 특히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이 완성된 후 이전의 고구려·백제 영토 및 그 안에 거주하던 사람들도 새로이 신라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고구려·백제의 지배층은 본국에서 갖고 있던 관등의 고하에 따라 신라의 관등을 수여받음으로써 골품제 안에 편입되었다. 그리고 신라 6부의 공동체적 결속이 약화되고 통일전쟁을 수행해감에 따라 경위와 외위를 구분할 필요성이 약화되었다. 따라서 골품제의 직접적인 규제를 받던 왕경인에게만 수여했던 경위는 신라 중고기말부터 지방민에게도 주어졌다. 특히 대당전쟁을 수행하면서 백제·고구려 유민세력을 포섭하기 위해 그들에게도 경위를 수여하였다. 이리하여 674년(문무왕14)에는 경위와 외위의 대응관계를 정하고 양자간의 공식적인 교류가 인정됨에 따라 단일 관등체제가 형성되어 외위는 점차 소멸되었다. 이로 인해 전국을 일원적으로 지배하는 체제가 이루어지고, 이 과정에서 왕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세력과 이전의 골품제적 특권에 의해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귀족세력간의 마찰이 끊임없이 발생하였다. 통일신라기의 사회변화와 경제적 계층분화가 심화됨에 따라 신분제도 동요되었다. 진골과 6두품 등 지배 신분층은 크게 변화하지 않았으나, 일반 평민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가 성장함에 따라 1∼3두품의 구분은 의미를 상실하고 4두품도 평민과 비슷한 처지로 되었다. 그러나 폐쇄적 성격이 강한 골품제는 변화된 사회양상을 모두 수용하지 못하고 이전의 운영원리를 고수하여, 신분제로서의 탄력성을 상실하고 사회변동을 가로막는 장애요인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물론 통일신라기에 국학과 독서삼품과를 설치하여 능력에 따른 관리등용을 시도하기는 했지만 신분제의 강한 벽에 막혀 본래의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 특히 신라 하대에는 지배계층의 분열과 왕위 쟁탈전이 심화되면서 지배계층 스스로 골품제의 동요를 초래했다. 그리고 6두품을 중심으로 골품제의 한계에 회의를 가진 계층의 불만이 누적되고, 관직진출을 포기한 채 선종 승려나 사상가로 변신한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골품제는 신라사회를 통제하는 실질적 기능을 상실했다. 그리고 이들 비판적 지식인들의 활동은 신라말 고려초의 사회변동에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 여기에 신라 하대 국가통제력이 이완되고, 계속된 자연재해와 수취체계의 모순으로 농민생활이 극도로 불안정해짐에 따라 골품제의 사회경제적 기반이 붕괴위기에 처하였다. 신라 하대에 빈번히 발생한 농민 반란은 골품제가 더 이상 사회 통제 기능을 갖지 못하였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골품제는 결국 고려의 성립으로 소멸했다.
참고 : 한길역사강좌12-寒國古代史論7-삼국시대의 사회구조와 신분제도 [이기백-한길사]
새롭게 쓴 한국고대사 [김기홍-역사비평사]
신라의 사상과 문화 [김상현-一志社]
신라의 기와 혼을 찾아서 [박영조-한국문원]
新羅社會史硏究 [이기동-一潮閣]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nj83.hihome.com/snj83-1-40.html
http://oneness.pe.kr/study/history/골품제도.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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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6.06
  • 저작시기20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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