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한 개화사상 연구의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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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남북한 개화사상 연구의 비교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서론

본론
1. 개화사상의 발생
2. 개화파의 형성과 활동
(1) 개화파의 형성
(2) 개화파의 활동
3. 갑신정변
(1) 갑신정변의 배경과 전개
(2) 갑신정변의 영향과 의의

결론

본문내용

하였기 때문에 부르조아혁명의 주요 동력인 농민대중이 개화운동과 동떨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부르조아혁명을 위한 현실적인 정치적 역량의 준비가 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남한에서의 백성들의 지지결여와 비슷한 맥락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남한에서는 백성들이 계몽을 받지 못하여 '개화'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동조할 수 없었다는 것으로 개화파들이 백성들을 교육하지 않았음을 탓하는 것임으로 자신의 계급을 버리지 못했던 개화파를 탓하는 것인 북한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2) 갑신정변의 영향과 의의
갑신정변의 영향: 정변의 실패로 인하여 개화파는 몰락하였고 친정 수구파가 재집권하게 되었다. 또한, 일본에 갑신정변의 피해보상을 해준 굴욕외교의 산물인 <한성조약>과 일본과 청국이 조선에 대한 침략에 대해 대등한 권리를 갖는 것을 규정한 침략적 조약인 <천진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러한 내용은 북한에서는 다뤄지지 않았다.
갑신정변의 의의: 남한에서는 세계사적으로 한국민족이 대개혁을 단행하기에 가장 적절한 시기
세계근대사와 동아시아근대사를 보면 '정한론' 이후 한국침략을 노리던 일본제국주의가 실제로 이웃 나라를 식민지화할 능력을 갖게 된 것은 빨리 잡아야 청ㆍ일전쟁(1894~1895) 무렵이고 늦게 잡아보면, 러ㆍ일전쟁(1904~1905)무렵이었다고 할 수 있다. 빠른 경우로 보면 갑신정변(1884)의 10년 후에는 일본이 제국주의 실력을 확립하여 한국에 대한 식민지화 침략능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개화파의 영민한 청년들은 조국의 자주독립과 자주근대화를 위해 10년의 급속한 근대국가 건설기간을 가지려고 시도한 것이었다. 上同 p. 434.
에 정권을 장악해서 '위로부터의 자주근대화의 대개혁'을 단행하여 가장 적극적으로 전근대적 국가체제를 청산하고 자주부강한 근대국가를 건설하려고 한 과감한 자주근대화운동이었다고 보고 있다. 또한, 한국근대사상 개화운동에 일정 방향을 정립해 주었으며 한국의 반침략 독립운동에도 하나의 근대적 기원을 정립하였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갑신정변이 한국의 근대민족주의 사상과 운동의 형성 발전에 하나의 이정표를 세운 운동이었다고 하고 있다.
북한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자본주의적 관계가 발생발전한데 기초하여 합법칙적으로 일어난 근대초기의 가장 큰 정치 사변이었으며, 부르조아혁명투쟁이었다고 한다. 이 투쟁은 역사 발전의 합법칙적 요구를 반영하여 나라의 자본주의적발전의 길을 열어놓기 위하여 벌린 심각한 투쟁이었으며, 따라서 갑신정변은 우리나라가 자체발전의 합법칙성에 기초하여 부르조아혁명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될 수 있는 새로운 역사적 시기에 들어섰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한다.
갑신정변의 지도사상은 개화사상이었다. 개화사상의 발생을 자본주의로 이행시에 필요한 새로운 사상이며 개화파를 자본주의이익의 대변자라고 했던 북한은 갑신정변이 단순한 혁명이 아닌 자본주의로의 이행시에 겪게 되는 합법칙적인 투쟁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결론
남한의 개화사상연구는 외세의 침략으로 형성된 민족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사상의 하나로 개화사상이 발생하였고 한다. 외세의 부강함을 조선도 갖춤으로써 위기를 타개하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 개화사상을 실현하는 개화파들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이나 청국의 양무운동을 살펴보고 조선을 개화하여 독립적이며 부국강병한 국가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조선은 서구의 열강들과 수교를 맺고 그들의 개혁을 배워야 한다고 했다. 당시 열강의 세력을 적절하게 이용하여 조선의 독립을 유지하는 이이제이정책을 조선은 세계정세에 맞춰가며 사용하였다. 비록 외세에 의존하는 개화를 지지하는 사상이 남한의 개화사상이지만, 부강한 국가가 되어야만 민족적 위기를 타개할 수 있는 당시의 상황에서 자체의 개혁 역량이 없었던 조선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북한의 개화사상연구는 낡은 봉건제도를 버리고 자본주의 제도로 이행시 필요한 새로운 사상이 조선 내부에서 일어났는데 그것이 바로 개화사상이라는 것이다. 이 개화사상은 부르조아지의 자본주의적 이익을 대변하는 선진 사상으로 그들의 필요에 의해 생겨났다. 당시 조선은 낙후된 봉건제도로 인한 심각한 위기상황에 빠져 있었다. 이러한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원해야 한다는 정치적 식견이 곧 개화사상이었던 것이다. 물론 단순한 낙후성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세계적 추세에 비해본 봉건제도의 낙후성에 대한 자각이었다. 이러한 낙후성의 자각은 봉건제도를 그냥 두고서는 자본주의침략에 의해서 나라가 망하리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 때문에 일대 혁신을 일으켜 나라의 발전을 자본주의적 방향으로 돌려세워야 하겠다는 결론을 얻은 것이다. 자본주의적 방향으로의 이행은 조선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부르주아적 역량으로 가능하다고 보았으므로 외세의 간섭은 자주권에 대한 침해일 뿐이었고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이었다.
남북한 개화사상의 공통점은 조선의 근대화 즉, 부강한 근대국가로의 이행을 원했다는 것이다. 조선의 자주독립에의 위협을 느끼며 형성된 공통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남한은 이에 대한 자각을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하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외세의 부강함을 쫓아가려한 반면 북한은 이에 대한 자각을 스스로 했으며 이를 타개하기 위해 나라를 자본주의적 방향으로 개혁하려 하였다. 타개책이 다른 이유로 남한은 조선이 자체적 개혁 역량을 갖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하였으나, 북한은 조선은 스스로 봉건제의 위기를 벗어나 자본주의제도로 이행 할 수 있는 역량을 갖고 있다고 본 것이었다.
이러한 남북한 개화사상 연구의 차이를 보면서 어느 한쪽이 옳다고 판단할 수는 없었다. 양쪽 개화사상의 연구가 나름대로의 타당성과 부당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근대화는 남북한 두 가지의 개화사상 연구를 통해 본다면 어느 한쪽을 보는 것보다는 치우치지 않는 관점에서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 참고문헌 ◈
『조선전사 13』, 과학ㆍ백과사전출판사, 1980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38』, 탐구당문화사, 1999,
과학원 역사연구소,『조성통사(하)』, 오월, 1989
金玉均, 「甲申日錄」, 1884년 12월 1일, 『金玉均全集』, 아세아문화사판,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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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6.08
  • 저작시기2004.0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544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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