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천인의 보충대를 통한 신분변동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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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시대 천인의 보충대를 통한 신분변동 연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 서 론

■ 본 론
제 1 장 보충군(補充軍)의 설치
제 1 절 조선의 건국과 태조의 사회정책
제 2 절 양인확대정책의 계승과 태조의 독자정책
제 3 절 세종의 환천법(還賤法) 시행과 양인확대정책의 축소
제 4 절 종부법(從父法)의 실시로 여진족을 제압한 세조
제 2 장 보충대(補充隊)와 천인(賤人)의 신분변동(身分變動)
제 1 절 성종의 급양인(及良人)
제 2 절 훈구파와 신진사림 사이의 중종
제 3 장 조선후기의 보충대
제 1 절 임진왜란의 발발과 급변하는 신분
제 2 절 광해군 시대의 크게 달라진 천인들의 종량(從良)

■ 결 론

본문내용

이러한 참급무과와 불법적인 무과급제 두 가지의 경우로 나누어 살펴보면, 공사천 무과는 선조대에 처음 설치되었으나 한 번도 시행되지 않았다. 이 것으로 천인의 신분상승은 실현될 수가 없었던 것으로 보일 수 있으나, 실제로는 정부의 묵인하에 혹은 불법적 수단에 의해 천인의 종량은 광범하게 실현되었다. 먼저 임진왜란 중 의주 피난처에서 실시한 별시무과에서 토병이 대량으로 급제한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또한 임진왜란 중 필요한 군사를 확보하기 위해 실시한 참급무과에서 하삼도 지방의 천인들의 종량이 대량으로 실현되었다. 선조가 내린 “초시에 합격하고 전쟁에 나가 수급하면 즉시 홍패를 지급하라“는 것을 들 수 있다. 여기의 홍패의 소지는 곧 신분상승과 직결되었다.
이후 임진왜란이 끝나고 사회가 안정됨으로써 상대적으로 임진왜란 기간보다 신분변동 요인이 축소될 것으로 보이는 광해군대에 있어서 광취무과를 통한 신분변동을 알아보면, 천인들의 무과급제는 선조대와 마찬가지로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회가 안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천인의 종량폭이 축소되지 않은 몇 가지 이유를 보면,
첫째로, 이 시기에 여진족을 통일한 후금의 세력이 급팽창하여 국경을 방어할 부방군사가 필요했고, 둘째로, 임진왜란 이후 계속된 사회현상으로 오위의 군사제도가 붕괴됨으로서 양인상층의 군역회피현상이 만연했고, 이에 따라 군병의 수는 엄청나게 줄어들어 천인의 양인화를 가져왔으며, 셋째로, 광해군대에 실시된 일련의 종량정책은 광해군과 북인정권의 개방적인 신분정책에 바탕을 두고 있음이다.
따라서 광해군의 광취무과 실시 이전의 선조대와 구별되는 종량정책으로는 우선, 양계지방의 내노와 공사천이 보충대와 장용대의 거관을 통해 종량한 것이고 다음으로는 도망한 사천이 내수사에 투속한 다음 내수사의 권력으로 종량한 것이다. 후자의 경우엔 사천은 사유재산이므로 본주에게 일련의 보상을 해야 했다.
이런 광해군 전기의 무과급제는 정부와 급제자가 상호 다르게 인식한 과도기였다. 그 이유로 정부는 무과급제자를 부방군사의 확보수단으로 본 반면, 급제자는 관직과 관품을 제수받아 신분상승하는 수단으로 본 것이다. 따라서 무과급제자는 홍패를 소지한 순간부터 부방을 기피하기 시작했으며, 그 방법으로 서울경기지역 무과 출신자들이 부방이 면제됨을 악용한 사례와, 군직에 제수되어 부방을 모면하는 것, 그리고 지방관리와 결탁하여 면제받는 법을 이용하였다.
이 때문에 부방군사는 계속 부족하게 되었으며 이 대비책으로 실시된 것이 광취무과와 호패법이다. 하지만 호패법은 실시되기 직전 폐지되었다. 이런 사실을 반영한 광취무과 실시의 전제조건은 모든 급제자들은 서북지방의 부방을 반드시 거쳐야 하는 역으로 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1만명의 무사를 급제시키는 것이었다.
결국 광해군의 개방적인 신분정책을 배경으로 대량의 천인들이 양인화할 수 있었고, 결국 조선 후기 신분질서를 허무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광해군 이후 인조 효종 숙종 시기의 만과에 대해 알아보면,
진보적 정치세력인 북인의 대두와 양명학 수용, 친후금정책 등의 밀접한 관계로 천인의 종량이 큰 폭으로 확대된 광해군 시기와는 다르게 친후금정책을 반정의 명분으로 삼은 인조정권은 성리학을 지배이념으로 표방하고 신분의 개방성은 폐쇄적 성향으로 전환되었으며 이에 따라 천인의 양인화도 대폭 축소되었다.
우선 인조정권의 병자호란 이전시기는 반정공신세력의 보수성으로 신분제는 보수화 경향이 심화되었으며, 인조반정, 이괄의 난, 정묘호란 때에 무과급제를 통한 천인의 신분상승은 실현되지 않고 다만 반정이 후 환천된 천신분과 무과계급자에게 본직을 돌려주거나 군량수납을 조건으로 서얼을 허통하였을 뿐이다
하지만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군신관계를 맹약한 굴욕적인 병자호란 이후 반정공신들의 세력은 급격하게 쇠퇴하게 되었으며, 반주자학적 실리론과 현실 체제개혁론이 전개되어 천인의 무과응시가 가능한 여건이 조성되었다. 그리하여 산성무과를 통한 천인의 종량이 확대될 수 있었다.
이후 보수적인 효종이 집권하기 시작하면서 인조대보다 더욱 종량의 폭은 축소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이나 비변사등감에서 천인의 무과급제가 드물게 나타난 점과, 무과에 급제한 이천학의 환천에 대한 상소가 기각당한 점, 무과 활쏘기 시험에서 대사한 자는 장 1백대에 처한 후 수군에 충정한 점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숙종이 집권하면서 중용된 윤후가 만과를 창설하면서 천인의 무과급제 폭은 대폭 늘어나게 되었다. 선조, 광해군, 인조대에는 불법적인 무과 응시 사례가 대단히 많았으나 숙종 대에 만과가 실시되면서 불법적인 무과응시 사례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천인들의 무과응시가 보편화됨으로써 나타난 현상으로 몇 가지 근거를 보면, 우선 만과 급제자가 전국적으로 1만8천여명으로 엄청났으며, 조,자손 3대가 같이 등과한 경우, 나이차가 60세가 나는 자도 등과한 경우에서 응시조건이 의도적으로 낮추어 졌음을 볼 수 있다. 공사천이 단지 무재만으로 면천된 이 같은 경우는 숙종의 북벌수행을 위한 대내적 여건조성과도 관계가 있지만, 오위와 진영제가 오군영과 영장제로 전환된 군제변동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결 론
조선의 신분사회는 끊임없이 변화를 겪어왔다. 그 변화는 내부적으로는 왕권과 신권의 줄다리기에 의해, 외부적 요인으로는 중국대륙의 왕조변화와 왜국의 침략을 들 수 있겠다. 조선의 천인들은 그러한 변화의 질곡 속에서 지속적으로 신분상승을 꿈꾸어 왔으며, 무과급제를 통해 그들의 꿈을 실현시켰다. 선조대의 천인무과와, 광해군대의 광취무과, 그리고 숙종대의 만과가 바로 그 꿈을 실현시킨 통로역활을 했으며, 이는 임진왜란 이후 천인의 무과급제가 광범하게 실현되었음을 보여준 것이다. 정약용이 언급한 “모두가 양반이 되면 양반은 사라진다.”라는 문구는 바로 평등을 실현하는 방법론이며, 조선후기 무과의 실시로 인해 많은 천인들이 양인화 하였으며, 이는 곧 신분제의 파괴를 의미한다 하겠다. 결국 조선사회는 끊임없는 변화를 겪었고, 후기에 들어서서는 급격하게 그 변화의 폭이 커졌으며 이것은 조선시대의 신분 변동론적 관점에서 타당한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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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6.23
  • 저작시기20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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