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장 明代 동아시아의 새로운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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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제 9장 明代 동아시아의 새로운 전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명(明)의 건국과 통치체제(統治體制)
(1) 元·明 교체의 역사적 의의
(2) 明의 건국과 주원장집단(朱元璋集團)의 성격
(3) 태조(朱元障)의 통치 정책
(4) 영락제(永樂帝)의 등극과 대외발전

Ⅱ. 내각제(內閣制)의 발전과 환관정치의 극성
(1) 내각제(內閣制)의 발전과 권신(權臣)의 등장
(2) 명대(明代) 환관정치의 성격
(3) 북로(北虜), 남왜(南倭)의 화(禍)

Ⅲ. 장거정(張居正)의 혁신정치(革新政治)와 명제국(明帝國)의 동요
(1) 장거정(張居正)의 혁신정치
(2) 당쟁과 동림(東林), 복사운동(復社運動)
(3) 이자성(李自成)의 반란과 명의 멸망

본문내용

거하였다. 동림파 관료는 동거에 반대하였으나 황제의 뜻을 꺽지 못하고 이씨를 별궁으로 옮겨 정치에 개입하지 못하게 한다.
⇒ 이와 같이 삼안(三案)은 모두 돌발적인 사건이었으나 사건 처리에 대의명분을 앞세우고 파당을 갈 라 치열한 당쟁으로 몰고 가서 결국 명의 멸망을 자초하게된다.
② 동림운동(東林運動)
☞ 신종시대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치와 사회개혁을 일으킨 것이 동림당의 동림운동이다. 동림당 은 명말(明末)의 정치적 혼란과 불안한 사회를 바로 잡으려고 정치와 사회개혁운동을 끊임없이 전 개하는 한편 신종대의 태자책봉, 삼안(三案)의 처리 등 현실적으로 황제의 뜻에 거역하는 민감한 정치문제에 깊이 관여하였다.
ㄱ. 동림운동의 의미
- 좀은 의미: 환관의 전횡, 내각집권파(內閣執權派)의 파벌적 정치에 반대하는 운동
- 넓은의미: 이갑제의 붕괴과정에서 초래된 사회경제 체제의 위기를 둘러싼 정치투쟁으로서 일 원(一元)적 황제전제지배체제를 반대하고 분권공치적(分權公治的) 군주주의를 표방한 운동
ㄴ. 동림당에 대한 평가
- 정치와 사회개혁운동을 추진하고 환관파와 정치 투쟁을 전개하였다는 점은 높이 평가되나 그들 의 비타협적 도덕주의는 당쟁을 격화시켜 결과적으로 명제국의 멸망을 초래했다는 비난을 면하 기는 어렵다.
③ 복사운동(復社運動)
ㄱ. 중앙에서 동림당의 활동이 탄압을 받을 즈음 강남을 중심으로 새로운 재야 세력의 정치활동이 시작되었으니 이를 복사운동이라 한다. 복사는 유교적 도덕의 실천을 내세운 서원(書院)과는 달리 고학복흥운동(古學復興運動)을 전개하면서 각지에서 조직되었다.
ㄴ. 복사는 강남지방을 중심으로 독서인들이 모여 문장을 발표하고 과거시험답안을 출판하면서 문 인들이 연합하여 결사를 이루고 정치색을 띠게 되었다. 동림당은 관료조직이기 때문에 환관 및 환관파 관료들의 집중 공격과 탄압을 받았으나 복사는 하급신사(下級紳士), 생원(生員), 독서인 이 절대다수로서 문장연구의 명분을 내걸고 공공연히 사(社)를 결성하여 통일된 집단행동을 취 하면서 강남지방을 중심으로 동림의 정치운동을 계승하였다.
(3) 이자성(李自成)의 반란과 명의 멸망
① 발단
- 명말 숭정(崇禎)시대의 농민 반란은 섬서북부에서 시작된다. 이 지역은 이미 만력시대부터 과중 한 노역에 시달려 향촌에서 도망하는 자가 속출했었다. 그 후 천계 7년에 섬서 지방에 극심한 재해가 몰아 닥쳤는데 지현(知縣)인 장두요(張斗耀)는 재해와 상관없이 징세를 강요하니 농민은 왕이(王二)의 선동으로 장두요를 살해하고 농민반란의 서막을 올리게 된다.
② 전개
- 숭정 원년 (1628)에 왕가륜, 고영상 장헌충이 가담하여 반란군의 세력은 더욱 커졌다. 이에 명 조정에서는 홍승주를 총사령관으로 하여 국경수비를 맡고 있던 병력만을 제외한 전군을 동원하 여 반격에 나서게 된다. 이때 반란군은 형양에 집결하여 대책을 강구하는데 이자성이 적극적인 공세를 주장하고, 그 후 고영상과 이자성의 부대가 봉양(명조의 발상지)을 공격하여 명 왕릉을 파괴하니 명조의 위신은 크게 손상을 입게된다. 숭정 9년에는 고영상이 정부군에 의해 살해되자 이자성이 군을 통솔하고 틈왕(고영상)의 칭호를 계승한다. 이자성은 한 때 위기에 몰리기도 하였 으나 지신인 이암 (토지의 균등분배인 귀천균전(貴賤均田),삼년간의 조세감면 정책제안)과 우금 성 등을 맞이하여 새로운 개혁안을 제시하면서 반란군 수령에서 일약 황제자리를 넘보는 정치지 도자가 된다. 이자성은 1644년 자금성에 입성하고, 이로써 명은 건국한지 276년만에 농민반란군 에 의해 멸망한다. 그러나 이자성의 북경점령은 40여일만에 명나라 장수 오삼계가 이끄는 청군에 의해 막을 내린다. 이렇게 쉽게 무너진 것은 오삼계에 대한 대책 소홀과 지식인 사이의 파벌투쟁, 반란군과 시민과의 잦은 충돌 등이 원인이었다. 이렇게 되자 반(反)이자성 연합 전선이 형성되고 이자성은 쫑기게 된다.
③ 경과
- 명의 멸망후 그 유족과 관료들은 남경에서 남명정권(南明政權)을 수립하고 복왕(福王)을 옹림하 여 홍광제(弘光帝)로 추대한다. 그리하여 강남과 복건 광동지방에서 명의 부흥운동(복명(復明)운 동)을 전개하였으나 명 말 이래 동림파와 비동림파의 대립 및 붕당정치가 계속되어 차례로 무너 졌다. 마지막 남명정권인 영력정권(永曆政權)도 1661년 영력제가 버어마까지 쫓겨갔다가 체포되 어 죽은 후 와해되었다. 또 정성공(鄭成功)도 대만에서 반청복명(反淸復明)운동을 전개하였으나 강희제 때 평정되었다. (16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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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9페이지
  • 등록일2004.06.27
  • 저작시기2004.0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57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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