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패션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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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사회적 배경

2. 문화 및 예술사조

3. 패션경향
- 70's 시대 배경 및 패션(表)
- 70's PUNK FASHION
- NEW WAVE 그로부터 20년

4. 대표적인 디자이너
- Yves Saint-Laurent(1936~)
- Claude Montana(1949~)
- Kenzo(1939~)
- Jean-Paul Gaultier(1952~)

본문내용

억을 떠올린 미국인들에 의해 소동이 일어났다. 몽따나는 가죽에 어울리는 형태와 구성을 찾기 위하여 펑크 패션과 동시에 나치의 군복에서 영감을 받은 스타일이라고 설명했다. 가죽이란 원래 약간 공격적인 룩 이고 조직화된 구성을 요구하는 재료이다. 그러나 그가 사용하는 부드러운 유연성을 지닌 가죽은 이러한 형태를 감추고 부드럽게 한다고 설명한다. 결국 몽따나의 공격적인 스타일의 형태는 인정되었고 높이 평가받고 있다.
Kenzo(1939~)
Kenzo는 1970년대 초부터 파리에서 자리잡아 그곳에서 디자인 업에 첫발을 내딛은 최초의 일본인 디자이너에 속한다.
Hyogo에서 태어난 겐조는 1958년에 동경에 있는 문화 복장 학원에서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1965년에 파리로 가서 Louis Feraud에게 그가 그린 5가지 스케치를 판다. 이윽고 Pisanti에게 고용되어 직물관계 스타일의 책임자가 된다.
1970년에Douanier Rousseau의 경관 속에서 Jungle Jap을 조직한 그에게 Vivienne 갤러리에서 부띠끄를 제의한다. 같은 해에 Choiseul를 지나가는 곳에 부띠끄를 열고, 1972년에 Cherche-Midi 거리에 3번째 부띠끄를 세운다. 1976년 Victoires 광장의 아름다운 환경에서 그는 개인저택으로 스튜디오, 사무실, 그리고 커다란 규모를 지닌 부띠끄를 다시 세운다. 1983년에 뉴욕에 있는 메디슨 가에 부띠끄를 설립하고, 1984년과 1985년에는 많은 부띠끄를 지방과 외국에서 세운다. 같은 해에 그가 지난10년 동안 디자인한 제품에 기초를 둔 전공논문이 문화출판국에 의해 출판되었다. 1983년부터 겐조는 남성복 라인을 선보인다. 외국에서 히피풍의 의류를 장식하는 요소-루마니아의 튜닉, 아프가니스탄의 망또나 인도의 스카프-가 유입되던 시기인 1970년대 초부터 겐조는 이런 전통적인 의상에 상이한 해석을 부여할 줄 알았다. 첫번째 콜렉션부터 일본의 기모노(Kimono)의 원리에 입각하여 평면적으로 재단하였지만, 한 나라의 스타일에 한정되지 않고 매우 독장적인 스타일에 도달하기 위해서 영감의 모든 원칙(특히 Max Tilke의 작품에서 연구한다.)들을 혼합하였다. 그래도 역시 작품의 균형과 형태는 비교적 절제되어 있고, 서양의 고정적인 스타일과 유사하였다. 이러한 경향 때문에, 겐조의 고객은 나이와 취향이 매우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마음대로의상을 고를 수 있을 만큼 디자인의 폭이 넓다. 또한 스코트랜드의 날염된 천이나 꽃무늬가 있는 천의 사용과 강렬한 색상의 대담한 배합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1978년부터 그는 짧은 상의와 앞으로 지향하는 콜렉션의 기본을 이루는 판탈롱처럼 짧은 상의 라인을 생각하고 있다. 언론에서 소개하는 그의 콜렉션은 그들이 가지는 견해의 독창성으로 두가지로 구분하는데, 첫 번째는 1970년대에 일에떼 원느 프와당 웨스트(Il Etait une fois I'Ouest : 옛날에 프랑스 서부지방에 있었다.)의 음악을 토대로 비비엔느 갤러리에서 개최된 콜렉션이고, 두 번째는 1977년 뉴욕에서 그가 개점한 54 스튜디오에서 선보인 콜렉션이다.
Jean-Paul Gaultier(1952~)
패션계의 앙팡 떼리블(l'enfant terrible : 무서운 아이)은 파리 교외의 Arcueil의 평범한 프랑스 가정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미학자인 할머니의 영향으로 여성의 화장품과 의상이 연출하는 결과로 생기는 변신에 흥미를 느낀다. 고등학교 때 까지 평범한 학생이었던 그는 패션잡지와 Cardin이나 Saint-Laurent 같은 위대한 디자이너의 영향을 받고, 15세 때부터 열심히 작품을 디자인한다. 이런 어린 시절에 저절로 형성된 교육은 패션계로 뛰어들게 하는 원인이 된다.
Jean-Paul Gaultier의 부모는 그의 스케치를 팔아서 용돈으로 사용하라고 권하는 등 용기를 복돋아 준다. 그래서 그는 우편으로 디자이너 샵에 일련의 스케치를 보낸다. 18살이 되던 날에 파트타임으로 그를 고용하겠다는 Pierre Cardin의 답장을 받는다. 1971년에 쟝 뽈 골띠에는 몇 달동안 Jacquis Esterel 샵에어 보내다가 Patou 샵에 들어간 후, 1974년에 다시 가르댕 샵에서 일한다. Gunnar Larsen에 의해 선택된 수영복 스케치는 Createur-Industrie d'Audree Putman 그룹이 Mode Internationale에서 발행했던 것과 결합시킨 것으로 이 스케치로 Saint와 계약을 체결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콜렉션을 갖고 싶은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 그래서 Saint Pierre 시장에서 산 직물과 짚으로 엮은 테이블 세트를 톱모델인 오랜 친구 Anna의 도움으로 1976년에 Palais de la De couverte에서 첫 번째 콜렉션을 발표한다. 이 콜렉션에서 부터 앞으로 그가 지향하는 경향-락 음악에서 영화에 이르기까지 시대의 사회.문화적 모든 풍조에 대한 민감성, 세번째 콜렉션 에서는 끈없는 브래지어와 Punk식의 검은색 타이즈와 Dolce Vita 스타일의 스커트를 결합했다-을 특징 지웠다. 그러나 이런 것에는 단단한 구조가 결핍되어 있었다. 이런 사실을 1978년 Kashiyama 메종에서 발견하는데, 1981년부터 이탈리아인인 Gibo의 후원과 Equator 덕택으로 보완된다.
쟝 폴 골띠에의 콜렉션은 '제임스 본드(James Bond)'(1979~80년 겨울), 하이-테크(High-tech)' (1981~81년 겨울), '르 다다이듬(Le Dadaisme)' 1983년 여름) 등과 같이 한 가지 테마만으로 만들어진다. 마륄렌느 델브르그- 델피가 쟝 뽈 골띠에에게 바친 전공논문 "생활을 위한 패션(La Mode pour la vcl)"에서 강조한 것처럼 그의 콜렉션은 모양을 내는 시대에 초연한 태도를 취하는 지식을 되찾게 하거나 준비하게 하고, 잠재적 문화의 유산에 속하게 한다. 그는 1984년에 첫 번째 남성용 라인을 발표하고, 1985년에 '르 데필레(Le Defile)'라는 제목이 붙은 공연을 만들기 위해 리젠느 쇼삐노(Regine Chopinot)와 협력한다.
  • 가격2,000
  • 페이지수11페이지
  • 등록일2004.07.05
  • 저작시기2004.07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59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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