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하대 호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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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을 주도해 간 호족은 지방의 대토지 소유자로 권력·무력뿐 아니라 문화적 능력도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호족들의 이러한 지위는 개인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한 지역에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동족집단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한편 나말여초에 성주·군장과 같은 대호족은 신라의 중앙귀족출신이거나 지방 읍사의 이직자 출신이었다. 그리고 대감·제감과 같은 소호족은 주로 촌주 출신이었다.
그런데 고려 초기의 정권은 이들 호족들의 조약이나 합의에 의해 성립된 것이 아니었다. 왕건을 추대한 개국일등공신들조차 호족이 아니었던 것이다. 따라서 호족연합정권은 아니었다. 그러나 호족연합정권의 특질과 성격은 가지고 있었다. 행정권·사법권·징세권 같은 측면에서 호족들의 독자성이 어느 정도 보장되었고 사심관제과 기인제를 통한 중앙과 호족간의 연락체계가 존재했던 것이다. 그리고 한국사의 어느 시기보다 호족들의 세력이 강하였다. 이런 면에서 고려초기 정권은 호족 연합적 성격을 가진 정권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고려왕조에서는 지방의 호족들은 물론이고 일부 농민층도 중앙의 지배 신분계층으로 상승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경주 중심의 폐쇄적인 골품제 사회였던 신라와 비교하면 명백한 사회 발전이었다. 이 같은 사회발전은 물론 농민들과 호족들의 끊임없는 노력의 결과였다. 따라서 나말여초 약 50여 년간의 전란은 신라사회의 모순을 개혁하기 위한 농민과 호족들의 항쟁 과정이었던 것이다.
Ⅲ. 결론
신라 하대는 한국사에 있어서 고대사회의 종말기로 여러 가지 사회적 모순의 노출된 시기였다. 이 때는 당나라에서 송나라로 바뀌는 5대 10국의 정치적 분열기였기 때문에 중국의 정치적 영향이 신라에 크게 미치지 못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는 신라 스스로 변화를 가져오는 시기에 해당한다. 당시는 신라 정부가 정치·사회적 혼란으로 통제력을 상실하면서 지방세력인 호족이 할거하는 지방 분권적 분열기로서 이어서 후삼국의 정립을 보게 되었다. 따라서 나말여초의 사회변동은 한국 중세사회로의 전환에 따른 진통으로서 큰 의미를 갖는다. 신라는 하대에 들어와 여러 방면에서 사회적 모순이 표출되었다. 진골귀족들의 왕위 계승전이 극심하였으며 토지의 일부가 귀족이나 사원에 집중되었다. 이에 따라 인구의 지역 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선종이나 도교·지리 도참설과 같은 새로운 사상이나 종교가 등장하기도 하였다. 진성여왕대에 이르러 이러한 사회적 모순은 더욱 심하게 되어 급기야는 농민들의 봉기가 시작되었다. 또한 폐쇄적인 골품제에 대해 불만은 품고 있던 6두품 세력이 여기에 합세하여 신라는 더욱 혼란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시기에 사회 개혁의 주도 세력으로 등장한 것은 지방의 호족들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호족은 신라 말·고려 초의 사회 변동을 주도한 지방 세력이었다. 호족은 경주 중심·진골 중심의 신라 골품제 사회를 해체하고 각지의 지방민과 다양한 계층의 인물들이 지배 체제에 참여할 수 있는 보다 개방적인 사회 체제를 확립하는 데 기여하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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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7페이지
  • 등록일2004.07.15
  • 저작시기2004.07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60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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