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왜 고구려사를 삼키려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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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국은 왜 고구려사를 삼키려 하는가??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이제야 부활하는 북방사

중국의 고구려사 편입 의도

김정일 정권 붕괴 이후를 대비(?)

동북동정 프로젝트

광명일보 시론의 억지

다민족 국가 유지 위한 심모원려

고구려사를 정치문제화하지 말라

한국의 동화정책은 있는가

힘 얻는 잡종 우세론

광명일보는 어떤 신문?

개혁 개방 기치와 파룬궁 비판 최초 게재

본문내용

은 단결하면 광명이 보일 것이다(團結起來 光明在望)라는 글을, 저우언라이(周恩來)는 광명의 길(光明之路), 주더(朱德)는 민주광명(民主光明)이라는 글을 써줌으로써 이 신문의 창간을 축하했다고 한다.
국공내전이 거의 끝나고 중국공산당이 사실상 중국을 통일한 1949년 7월, 광명일보는 경제문학문학평론학술신어문(新語文) 등을 주제로 한 특집판을 내면서 자기만의 독특한 색깔을 갖기 시작했다(중국에 정식으로 공산당 정부가 들어선 것은 1949년 10월1일이었다). 광명일보가 지식인을 독자로 한 학술문화 기사를 주로 싣는 신문이 된 것은 이때부터라고 한다. 중국을 개혁개방으로 이끈 덩샤오핑(鄧小平) 또한 광명일보를 통한 선전 작업에 관심이 많았다. 덩샤오핑 집권 초기인 1978년 광명일보는 실천은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표준이다(實踐是檢驗眞理的唯一標準)는 제목의 평론을 발표했는데, 이후 중국에서는 사상해방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 평론은 중국을 개혁과 개방으로 이끌자는 신호탄이었던 것이다. 이후 덩사오핑은 여러 연설에서 이 평론의 역사적 의의를 높이 평가한다고 강조하며 중국을 개혁개방으로 이끌었다.
개혁 개방 기치와 파룬궁 비판 최초 게재
덩샤오핑의 후계자인 장쩌민(江澤民) 또한 광명일보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장쩌민은 1991년 11월24일과 1993년 6월19일 광명일보의 간부들과 만난 자리에서 광명일보는 우리 당의 지식분자를 만족시키는 매우 중요한 신문이다. 나 또한 지식분자이기 때문에 과거에도 광명일보를 읽었고 지금도 읽고 있다. 광명일보는 국내외의 지식분자를 단결시키고 있다며 광명일보의 선전 작업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1994년 8월 광명일보는 중국공산당의 비준을 거쳐 신문의 편집 방향을 보다 명확히 규정하였다. 이때부터 광명일보는 중국 공산당 중앙 직속의 사업체가 되었으며 중앙 선전부를 대표하는 뉴스 기구로 자리잡았다. 광명일보는 파룬궁(法輪功)에 대해 처음으로 비판을 가한 매체인데, 광명일보의 비판 이후 중국 언론은 일제히 파룬궁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파룬궁에 대한 중국 공안의 탄압이 시작되었다. 광명일보에는 현재 300여 명의 편집기자가 일하고 있는데 상당수가 대졸 이상의 고학력자다. 1995년 광명일보는 중국어로 된 홈페이지를 개설하였고 지금은 광명일보 외에 세 개의 신문과 네 개의 잡지, 한 개의 인터넷 사이트를 운영하는 광명일보 보업집단(報業集團)이라는 신문그룹이 되었다. 중국 전문가들은 광명일보가 고구려는 중국사의 일부라는 내용의 시론을 게재했다면 이는 저자로 표기된 변중의 개인 의견이 아니라 중국공산당의 의지라고 보아야 한다고 분석했다. 따라서 학계는 물론이고 외교통상부와 교육부문화관광부 같은 관련 부처는 중국 정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 전문가는 이상하게도 한국 지식인들은 미국과 일본에 대해서는 비교적 할 말을 다 하는데 중국에 대해서는 말을 삼키는 경향이 있다면서 이번 광명일보의 고구려사 시론을 계기로 지식인 사회는 중국에 대해 당당한 자세를 가져줄 것을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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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8.25
  • 저작시기2004.08
  • 파일형식한글(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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