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린의 소설비평 「염소를 모는 여자」

목차

1. 90년대 여성소설과 전경린

2. 자기 정체성의 소멸과 발견

3. ‘미소’와 ‘염소’, 삶의 야누스적 얼굴

4. 일상의 균열과 탈주

본문내용

삶의 두 모습을 동시에 받아들이는 장면이다. 비로소 작가가 왜 주인공의 이름을 ‘미소’라고 했으며 ‘염소’라는 은유적 동물을 등장시켰는지 알 수 있게 된다. 판화의 양각과 음각의 조화로 이루어지듯, ‘미소’와 ‘염소’는 양화이면서 음화인 삶의 야누스적 얼굴이다. 그리고 여기서 염소는 아파트촌에 어울리지 않는 동물이며, 이는 곧 문명화된 세계에 밀려난 어떤 낯선 자연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4. 일상의 균열과 탈주
일상에서 권태로움을 느끼는 어느 날 한 남자가 자기 ‘새어머니의 영혼’인 염소를 며칠 간 맡아 달라고 부탁을 한다. 이 염소는 주인공의 마음속에 묻혀 있던 야생의 습성, 정열 혹은 욕망을 되비춰주는 구실을 한다. 다시 말해 권태로운 일상에 묻혀 있던 영혼(여성의 자기정체성)을 일깨우는 매개체인 셈이다.
자신의 아내가 염소를 맡게 된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면서 염소를 밖에다 버리고 문을 닫는다. 그리고 이미 남편의 외도로 서로 무관심하고 ‘훼손된 가정’이 되어버린 이 부부는 그녀의 탈주를 암시한다. 밤늦게 귀가한 남편에게서 심한 찌개 냄새가 난다고 잠자리를 거부하자, 남편은 오히려 그녀에게 염소의 노린내와 오줌 냄새가 난다고 하면서 폭력을 행사한다. 서로의 인격과 자존심을 걸고 싸운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녀는 몸이 가벼워지고 복잡했던 머릿속이 고요해졌다. 더 이상 망설이거나 고민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남편이 잠들자 아파트 뒤편에 있는 염소에게로 갔다가 밤에 염소를 돌보고 있던 검은 박쥐우산을 든 청년을 만난다. 그리고 청년에게서 다시 한번 탈주의 권고를 받게 된다. ‘영혼의 성소’이자 야생의 상징인 염소가 꿈(정열, 영혼)의 은유인 숲으로 가길 원하듯이, 일상에 묻혀 억압되어 있는 윤미소 내면의 꿈(정열, 영혼)을 이제 해방시키도록 권하고 있다.
결국 윤미소는 ‘이미 오래 전에 훼손된 집’을 떠나게 된다. 그녀의 가출은 무기력한 남편에게도 ‘무엇이든 어쨌든 해볼 수’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라 생각하며, 내 버려진 청년의 우산을 들고 염소를 몰고 어딘가를 향해 걸어간다. 결연한 그녀의 탈주 행위는 바로 ‘자신의 본질’을 향해 가는, 즉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길인 것이다. 이렇게 꿈꿀 권리를 찾아 무겁게 내딛는 미소의 행보에서 우리는 자신들의 이야기와 욕망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장면에 대해 한 평자는 ‘자기반성과 자기로의 귀환 의지의 절박함에도 불구하고 무엇으로 현실과 맞서 나갈 것인가에 대한 적극적 방법이 탐색되지 않고 모호한 상징으로 처리되고 있기 때문에 집 나서기는 일시적 떠남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점에서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여타의 여성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염소를 모는 여자?가 너무 사적이고 신변잡기적인 ‘내성소설’이라는 비판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주인공의 고뇌가 도시에 거주하는 신중산층의 30대 주부만이 겪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사회적·정치적·역사적 상황과 연관되는 문제의식을 함께 담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그녀의 소설이 사적이고 세태적인 여성소설로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이 소설집의 여러 소설에서 그녀가 줄곧 취하고 있는 일인칭 주인공의 서술방식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 참고 문헌】
전경린, 『염소를 모는 여자』, 문학동네, 1996.
김정숙, 「전경린의 <염소를 모는 여자>론」, 충남시문학회, 『문학시학』제11호, 2000.
박기범, 「전경린의 <염소를 모는 여자>론」, 청람어문교육학회, 『청람어문교육』 26집, 2003.
이선옥·김은하, 「‘여성성’의 드러내기와 새로운 정체성 탐색의 의미-90년대 여성소설의 흐름」,민족문학사학회, 『민족문학사연구』, 11호,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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