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광고역사의 변천
본 자료는 4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해당 자료는 4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4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한국광고역사의 변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구한말 시대 1886-1910
1.한국최초의 광고
2 한상주보의 광고
3.민간신문과 잡지 광고

일제 무단정치 시대 1910-1920
4.무단정치하의 일본 상품

일제시대 : 광고 성장 및 쇠퇴기

해방에서 제 4매체 등장시기
I.인쇄 광고시대
인쇄·전파광고 시대(1959~1981)
컬러광고 시대(1981~)

본문내용

었다. 1959년에는 통신 14, 일간지 42, 주간지 100, 월간 301, 기타간 94개로 합계 551개로 늘었다. 그러나 광고는 아주 적었다. 가장 큰 매체인 일간신문도 1958년에야 겨우 하루 8면을 발행하게 되었다. 동아일보의 경우 총수입 중 광고가 차지하는 비중은 1958년에도 겨우 23%에 지나지 않았다. 1960년에 창간되었던 「새廣告」란 한국 최초의 광고전문지 자료에 의하면 1958년 동아, 서울, 조선, 한국 4개 일간지의 광고 중 25%는 국산과 수입의약품, 35%는 국산과 수입영화였다. 식료와 주류는 3.2%, 의류와 섬유는 겨우 1.1% 였으니 이 무렵의 광고형편을 짐작할 수 있다. 광고료 계산은 1단1행(行)을 기준했으며, 1955년의 구분은 !
보통, 기사
잡보(기사란내 광고), 돌출, 제호하의 4종으로 되어있었고, 보통 광고가 1행에 40~50환이었다. 표현은 활자와 일러스트레이션을 섞은 것이었고 일본식 카피가 남아있었다. 1956년에는 KORCAD(호출부호-HLKZ) TV방송국이 개국했으나 3년뒤 화재로 소실되었다. 광고주는 극히 적었고 엄청나게 비싼 값 때문에 TV보급도 보잘것 없었다. 물론 모든 광고는 슬라이드였다. 이 시기 마지막해인 1956년에 부산 MBC라디오가 탄생했으나 광고는 미미했다. 특이한 일은 1957년에 한국일보가 광고한 상품에 대한 의견을 묻는 사고를 낸 것과 1959년 창간 5주년을 맞이해 광고윤리요강 및 게재기준을 제정한 일 그리고 역시 이 해에 해방후 처음으로 「200만환 현상 제1회 한국광고작품상」작품모집을 주최한 일이었다. 이것은 해방후 최초의 광고상 제도였으며, 「도안, 문안, 사진」의 3개 부문상이 있었다.
인쇄전파광고 시대(1959~1981)
1960년대에서 1970년대에 이르는 20년 기간에 한국은 농업국에서 공업국가로 변모했다. 100달라 수준의 개인당 GNP는 77년에 1,000달라를 넘어섰다. 정치적으로는 60년의 4.19학생혁명, 18년뒤인 79년 10월 26일의 박정희 대통령 시해와 뒤이은 정치 혼란이 이 시기에 있었다. 흔히 RCA TV로 불리던 KORCAD TV(HLKZ 호출부호)는 56년에 첫 상업방송으로 개국 했으나 단명에 끝났다. 59년에는 부산 MBC라디오 개국, 61년에는 서울MBC라디오, 뒤이어 국영KBS TV의 광고방송 개시 및 TBC,DBS의 개국으로 60년대 중반에는 이른바 4매체 시대로 접어들었다. 물건이 없어서 못 팔던 시대는 어느덧 사라지고 팔아야 하는 시대로 바뀌고 있었다. Seller의 시장에서 Buyer의 시장으로 변화하고, 아울러 광고는 사치가 아닌 필수로 되었다. 광고를 전문으로 하는 신종업종인 광고대행사가 대두하는 것은 당연했다. 60년대말에서 70년대초까지 10개 가까운 대소광고대행사가 생겼으나 결국은 매체사의 후광을 입은 3개사(오리콤,제일기획,연합광고->MBC애드컴)의 광고시장 과점으로 70년대는 막을 내렸다. 60년대말부터는 TV광고제작을 전문하는 프로덕션이 생기게 되었다. 아!
울러 일본의 ACC, 미국의 Clio광고수상작이 한국에 소개되었다. 조선, 동아, 중앙일보
동양방송, 경향신문 문화방송은 광고상 제도를 창설했다. 64년에는 광고개론서가 나오고 70년대에는 중앙대학교에 광고전공학과가 설립되었다. 68년에 처음 발표된 한국광고비 추정은 70년대 후반부터 제일기획이 그 일을 맡아 하게 되었다. 아울러 제일기획은 광고연감을 내기 시작했다. 79년 한국광고비는 2,186억원으로 GNP의 0.74%에 이르렀다 광고표현에도 심한 변화가 나타났다. 상업사진 스튜디오, 사진식자가 도입, CM전담성우, CM전용 스튜디오 시설, CF프로덕션, 색분해시설, CM송 작곡가, 녹음시설, 카피라이터즈클럽 등 갖가지 시설과 업종이 70년대 중반까지에 자리를 잡았다 광고는 싫지 않게 되풀이 하는 메시지로부터 전략에 기초한 크리에이티브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광고산업이란 개념이 자리잡게 되었다.
컬러광고 시대(1981~)
80년에 1,600달라 가깝던 국민1인당 GNP는 83년에 2,000달라, 89년에 5,000달라, 그리고 95년에는 드디어 10,000달라를 돌파했다. 개발도상국이란 말은 한국에 들어맞지 않게 되었다. 정치적으로는 5,6공화국의 군사통치시대가 90년대초에 막을 내리고 문민시대로 넘어왔다. 87년에 언론기본법의 폐기후 신문,잡지의 수는 2,400개에서 7년뒤에는 8,700개로 늘었다. 80년 언론통폐합, 방송의 공영화는 10년을 못 넘기고 끝이 났다. 소중한 표현의 자유는 부활했고 신문은 그 수뿐 아니라 기사내용, 1일 발행면수에서도 급증했다. 민방TV, 라디오, CATV, 지역민방 등이 90년대 첫 5년 사이에 부활 또는 신설되었다. 한국은 멀티미디어 시대에 돌입하고 있었다. 88년 88서울올림픽이 있은 해에 1조원을 돌파한 광고비는 이미 80년대중반부터 GNP대비 1%선을 넘었다. 그리고 95년에는 5조원에 가까웠고 미달라로는 60억달라를 넘어 세계10위권내에 들어서게 되었다. 87년부터 시작된 광고시장 자유화는 91년에 완전개방이 되었다. 이 시대에 가장 두드러진 일은 TV의 컬러화였다. 80년 늦가을 수출의 날 기념식을 계기로 TV컬러방송이 시작되었고 81년 봄에는 모든 TV?
恣?일시에 컬러화 되기에 이르렀다. 「컬러광고」가 개시되었다. 이때문에 한때 혼란이 있었으나 곧 극복되었다. 88서울올림픽은 그 슬로건 「서울은 세계로, 세계는 서울로」가 상징하듯이 한국이 세계화의 길로 들어서는 일대 전환점이었다. 언론과 표현의 자유는 광고의 자유로 이어졌다. 81년에 설립된 한국방송광고공사는 80년대말부터 탈규제로 나갔고 92년 문민정부 출범이후 그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컴퓨터그래픽의 도입은 90년대 광고표현 변화의 계기를 마련했다. 87, 92년의 대통령 선거전은 국가적 광고홍보전이었고, 광고산업의 위상에 측량키 어려울 영향을 미쳤다. 광고표현의 영역은 훨씬 넓어졌다. 찬반의 의견도 있으나 알몸광고가 신문에 나오게 되었고, 외국에서 만든 광고의 국내방영도 완전개방 되었다. 멀티미디어시대의 광고표현이 현안문제로 대두하게 되었다.
  • 가격2,000
  • 페이지수14페이지
  • 등록일2004.12.28
  • 저작시기2004.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80583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