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현대사 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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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고 있고 암살사건에 대해 모든 사람이 비난하고 있기 때문에 장례식에서 큰 혼란이 예상되나, 경찰과 군대의 주도면밀한 준비로 한국정부는 이를 충분히 수습할 수 있을 것으로 밝히고 있다.
안두희의 그간의 증언, 미군의 정보자료, 미 대사관의 공식 보고 등을 면밀하게 분석해보면, 미국이 암살사건에 대해 상당한 정보와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는 보이지만, 암살사건에 개입했다는 증거는 현재로서는 없다. 미국의 암살사건 개입여부는 미국이 혹시나 가지고 있을 CIC 관계 자료나 CIA 자료 등이 공개된 후에나 밝혀질 것으로 보일 뿐이다.
[결론]
=백범 김구의 역사적 의의
김구의 일생은 한국근현대사를 대표한다.
19세기 후반 질풍노도(疾風努濤)와 같은 격변의 시기에 태어난 김구는 청소년시절부터
배외(排外)구국운동에 뛰어들었고 일제가 한국을 강점했던 암흑의 시기에는 민족의 광복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으며, 특히 3.1운동 이후에는 온갖 고초와 역경을 뚫고 임시정부를 이끌면서 민족의 자존과 민주체제의 정통성을 지켰던 것이며, 광복 이후에는 우리 민족 자신에 의한 민족의 자주통일과 독립정부의 수립을 위해 전력투구하다가 비극적으로 그 생을 마쳤다.
그의 서거는 바로 그 자신의 비극이기에 앞서 민족의 비극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비극적 서거는 한국현대사의 전개에 혜아리기 어려운 손실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첫째로, 그의 서거는 일제식민통치의 유산을 적극적으로 청산할 수 있는 주도세력이
상실되었음을 뜻하였다. 많은 수의 항일애국지사들이 일제에 항거하는 투쟁에서 온갖 고초를 당한 끝에 순국하였고, 일제에 쫓기면서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으며,
다행하게 살아서 광복을 맞이한 인사들도 분단과 혼란의 군정기에 권력투쟁과 이념적 갈등으로 영일(寧日)이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군정은 남한의 사회체제 관리를 효과적으로 수행한다는 이유로 일제식민 당국의 앞잡이였던 경찰,법조인,교육자,기업인,행정관리,언론인, 문화인 등등의 친일세력들을 다시 채용하여 미군정의 하부조직으로 충원하였고, 이에 이들 친일세력들은 건국과정에서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조직화 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하였던 것이다.
거기에다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정권안보를 위해서 친일세력의 숙정을 소극적으로 하다가 드디어 친일 세력을 정치적으로 충원하였다. 이것은 한국현대사에서 또 하나의 비극의 씨앗을 심은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승만에 의한 친일세력의 정치적 충원은 그 이후 한국정치체제의 '정통성위기'의 주요 한 원인의 하나로 작용하여 왔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일제 식민통치의 유산을 열정적으로 청산할 수 있는 마지막으로 남은 지도자는
김구 뿐이었던 것이다.
둘째로, 그의 서거는 분단된 조국을 주도적으로 통합할 수 있는 민족적 양심을 가진 지도자와 그를 따르는 세력이 상실되었음을 의미하였다.
김구는 l948년 2월 l3일에 발표한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泣告)한다」는 성명서에서
"현시에 있어서 나의 유일한 염원은 3천만 동포와 손을 잡고 통일된 조국, 독립된 조국의 건설을
위하여 공동 분투하는 것뿐이다. 이 육신을 조국이 수용한다면 당장에라도 제단에 바치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는 소신을 확고히 밝히고 있다.
그는 정권과 이념을 초월하여 민족통일문제에 순수하게 접근하였으니. 비록 상황이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다고 하더라도 한국문제는 한국인 스스로에 의해서 풀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대북접촉을 과감히 시도하고 단독정부수립에 참여하지 않았던 것이다. 김구의 그러한 통일을 향한 신념과 대북접촉이 공산주의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순진한 노력이라고 비관하는 소리도 컸고, 실제로 그의 제l차 대북접촉은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항일 독립운동 과정에서도 이념적 갈등을 심각하게 경험한 그가 공산주의의 본질을 간과했으리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것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으면서도 민족의 양심에 따른 신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고자 했던 것이며, 만약 그가 더 오래 생존했다면 또 다른 대안들을 끊임없이 모색하고 실천하였을 것이다.
셋째로, 김구의 서거는 한국현대정치사에서 폭넓은 국민적 지지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민주적 지도자가 상실되었음을 뜻하였다.
한국헌정사에 있어서 비록 망명정부이긴 하지만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된 것은 전근대적 군주정치체제가 공식적으로 폐지되고 근대적 민주정치체제가 수립 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상해로부터 중경(重慶)에 이르기까지의 망명지에서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몇 번의 우여곡절이 있긴 했지만 민주공화정으로서 민주적으로 운영되었으며, 김구 자신이 임시정부의 지도자가 되었을 때도 물론 민주적으로 임시정부를 운영하였다.
이처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민주공화정으로 운영되었기 때문에 한국현대정치사에서 그 정통성(正統性)의 문제에 비교적 반론이 적은 것이다.
또한 김구는 이렇게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임시정부의 정치과정을 통해서 민주적 지도자로 훈련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민족공동체를 민주주의의 원칙에 따라 운영하고 발전시켜야 한다는 확고한 정치적 신념을 가진 지도자였으며, 이러한 배경이 그로 하여금 결코 카리스마에 의한 지도자가 될 수 없도록 하는 요인이 되었다. 그가 항일독립운동과정에서 비밀 결사적 성격을 가진 조직 활동이나 테러리즘을 이용하였다고 해서 그를 반민주적 지도자로 비판하는 견해도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항일투쟁의 방편이었던 것이다.
그가 생존했더라면 이승만의 카리스마적 권위주의를 견제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한국의 정치발전에 기여하였을 것으로 상정할 수 있다.
김구는 식민지 유산의 청산문제, 민족분단의 극복문제, 그리고 민주적 체재운영 문제에 있어서 확고한 신념을 가진 지도자였다.
따라서 그의 비극적 서거는 엄청난 민족적 손실이었으며 곧 민족의 비극이었다.
그렇지만 광복 50년이 되는 오늘에 와서야 그의 이와 같은 순수한 민족적 열정과 사상의 체계는 우리들에게 더이상 역사적 오류를 범하지 못하게 하는 지침으로 남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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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12.30
  • 저작시기20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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