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안(敎案)’과 의화단(義和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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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교안(敎案)’과 의화단(義和團)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I. 머리말 - 교안과 의화단운동에 대한 접근 방식
① 운동사적 접근방식
② 문명사 또는 사상사적 접근
③ 외교사적 접근

II. 19세기 후반의 ‘교안’ - 반기독교운동
1. 교회세력의 확장과 ‘민교(民敎)’의 대립
2. 반기독교운동의 전개양상
① 제1시기 : 1860년 북경조약 체결 ~ 1884년 중불전쟁
② 제2시기 : 1884년 중불전쟁 ~ 1894년 중일전쟁
③ 제3시기 : 1894년 중일전쟁 ~ 1900년 의화단 운동
3. 주도세력의 전이(轉移)와 지도이념의 전변(轉變)
① 주도세력의 전이
② 지도이념의 전변
4. ‘교안’의 처리과정

III. 의화단운동
1. 의화단의 ‘원류’와 산동성
▸ 의화권의 원류에 대한 규명 문제
▸ 산동의 사회경제적 변화
2. 의화단세력의 확대와 청조의 태도
▸ 의화단의 구성원
▸ 이념
▸ 청조의 대응
3. 열강의 대응과 ‘동남호보(東南互保)’
4. 의화단운동의 좌절과 신축조약
▸ 신축조약

IV. 맺음말

본문내용

임명하여 열강과 강화를 추진하였다.
- 청조는 이홍장의 요구를 수용하여 9월 7일 의화단을 '발본색원'할 것을 명령하였다.
- 이에 따라 각지의 관병은 대대적인 토벌작전에 나서게 되었고 의화단 세력은 열강연합군과 관군의 협격에 점차 궤멸되었다.
열강은 중국을 '과분'할 것인가 아니면 '보전'할 것인가를 논의했다.
- 당시 중국에는 연합군 10만 외에 동북지방에 별도로 러시아군 10여만이 주둔하여 북경 및 직예 전역과 동북지방을 거의 장악했으며 그 밖의 지역은 여전히 열강 각 국의 세력범위로 쪼개져 있었다.
- 더욱이 북경과 천진에서는 점령관리기구를 설치하여 통치권을 행사하였으며 사실상 영국 · 독일 · 러시아 등은 '과분'에 대비하고 있었다.
- 의화단 운동의 좌절이 '과분'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초래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격렬한 저항을 통해 직접통치의 비효율성을 열강에 인식시킨 것도 사실이다.
- 또한 열강 각 국 사이의 모순(이해관계의 대립)도 '과분'의 장애요인이었다.
- 러시아 : 청조로부터 동북지방의 독점적 권리를 얻어내기 위해 북경 점령군의 철수와 함께 러시아 공사관을 천진으로 옮길 것을 제의
- 영국 : 러시아의 동북독점을 반대. 남아프리카의 보어전투로 병력의 여유가 없자 일본을 종용하여 출병케 하였으며 독일과의 협조 아래 러시아의 확장을 막으려 하였다.
- 독일 ; 산동의 기득권을 굳히고 양자강 유역까지 세력범위를 확대하려 하였다. 러시아의 동북강점에는 관망하는 자세를 취했다.
- 러시아의 세력확대를 견제하는 한편 복건의 기득권을 강화하려 하였다.
- 프랑스 : 영국을 견제하는 입장에서 러시아를 지지. 북경점령군의 동시 철병에는 반대
- 미국 : 1898년 필리핀을 획득한 후 '문호개방', '이익균점'의 주장을 되풀이.
열강의 합의 : 형식상 중국의 영토와 주권을 인정하여 계속 서태후를 정점으로 한 청 정부를 유지시키며 강화의 조건으로 프랑스의 제의를 토대로 '의화대강' 12조를 결정하였다.
신축조약
① 배상금 지급
② 대고 포대를 해체하고 북경 일각에 공사관 구역을 설정하며 북경과 상해간을 잇는 철도 연변에 열강군대가 주둔한다.
③ 중국인은 금후 열강에 반대하는 단체를 조직하거나 가입할 수 없으며 지방관은 관내의 배외사건에 책임을 져야 한다. 의화단에 관련되었던 관리들은 처벌한다. 배외사건이 발생했던 성진에서는 과거실시를 5년간 정지한다.
④ 기왕의 통상조약에 대해 열강측이 요구하면 청측은 이에 협상하여 수정할 수 있다.
의화단운동은 청조의 대외의존성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좌절되었으나 화북의 의화단 세력이 소멸된 뒤에도 각지에서 분산적인 반외세운동이 계속되었다.
IV. 맺음말
1860년대 이래 반기독교운동으로부터 확대되어 의화단 운동에서 절정을 이루는 19세기 후반의 '반외세운동'은 결국 청조의 대외의존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지만 몇 가지 점에서 긍정적인 역사적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① 제국주의 열강의 '과분' 책동을 분쇄했다.
② 청조의 통치력에 심대한 타격을 가해 결과적으로 청말 혁명운동의 입지를 강화했다.
- 신축조약과 러시아 동북 주둔군의 잔류로 인한 국망의 위기가 일본유학생을 비롯한 중국의 신지식층에 혁명적 분위기를 고조시켜 신해혁명으로의 저류를 형성하였다.
③ 청조내의 수구파가 의화단운동의 좌절을 계기로 실각함으로써 양무파 관료가 다시 득세하고 통치력의 회복을 위해 국내의 개혁요구세력과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신정'의 추진이 그 표현이며 1898년의 개혁운동에서 제기되었던 제도개혁안이 거의 그대로 수용되었다.
반기독교운동 및 의화단운동의 성격규명과 관련한 문제 - 반제 반봉건적 성격에 대한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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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05.04
  • 저작시기2005.0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95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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