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문제의 시인 --신문광고로 시를 쓰는 작가 황지우
본 자료는 2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해당 자료는 2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2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본문내용

렇다면 시집 『무림일기』의 4분의 1에 해당되는 부분을 비디오 안내서쯤으로 보면 되겠는가?
사실 해체시가 중심을 다원화시키고 명료한 이성적 사유를 부정하는 양상으로 전개되는 것은 욕망의 틈입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중심과 주변, 언어와 비언어적 기호, 문법과 모순 사이 등 규준화된 것의 경계를 넘어서려는 욕망의 힘 없이 전위적 예술 운동은 발생하지 않는다. 욕망은 바이러스처럼 떠돌아 다님으로써 텍스트에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속성을 부여한다. 그것은 기계와도 같은 에너지이다.
문제는 무의식적 운동력으로서의 욕망을 생산적인 힘으로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단지 대중적 소비문화에 길들여진 값싸고 쉬운 욕망으로 이해해선 곤란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 쓰여지는 키치적 일상시들이 보여주는 것은 유희를 위한 유희, 퇴폐를 향한 욕망의 편집증적 집중, 그것의 차원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이들 시에서 보여지는 욕망은 운동에너지로서의 힘이 아니라 단일한 코드의 통속성이다. 즉 만화나 포르노물, 영화 등 대중오락예술에의 탐닉과 시 스스로 오락물이 되고자 하는 현상은 상업주의의 산물이 아닐 수 없다. 키치적 현상이야말로 정신적 허무에 허덕이는 근대인들이 보여주는 가장 직접적인 반응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비평적 거리를 상실한 가장된 패러디, 긴장성 없는 텍스트들의 단편적 조합들인 패스티쉬 등은 복제시대에 함몰된 시의 우울한 초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외에도 장정일의, 김춘수의 「꽃」을 패러디한 「라디오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 영화 「301, 302」를 패러디한「요리사와 단식가」, 「햄버거 먹는 남자」등은 아쉽게도 이전 세대가 지향했던 글쓰기 자체에 대한 자의식이나 지적 상상력들이 보이는 대신 현대 소비 사회에 길들여진 통속적 욕망이 보일 뿐이다.
전위 운동으로서의 해체시는 본질적으로 매체에 대한 각성과 자의식을 바탕으로 인간 사이의, 사회 속에서의 관계를 고민한다. 이 속에는 인생과 시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이 담기기 마련이다. 이러한 운동과 진지성이 결여된 추수적 해체는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 90년대에 전개되고 있는 해체시의 경향은 더 이상 문학의 새로움과 풍요로움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기존 해체시들의 상투적 재생산과 시의 정체성 상실을 가중하여 시 스스로가 자기소외를 겪는 참담한 상태를 가져왔다. 이들은 시각 매체와 가상 현실의 홍수 속에서 고유한 시로서의 매력을 드러내지 못하는 형편이다.

키워드

  • 가격1,000
  • 페이지수6페이지
  • 등록일2005.06.04
  • 저작시기2005.0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00386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