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원 이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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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초기 문학기
2. 중기 문학기
3. 1937년 수양 동우회 사건 후

Ⅲ. 결론

본문내용

을 했었고 일본이 만든 어용단체에 간부이름으로도 여러군데 올라있었다.
광복이 된 후 1948년 8월 이광수는 「삼천리」에 「나는 독립국 자유민이다」라는 글을 썼다. 이것이 민족앞에 참회하는 최초의 공적인 글이었다.
나는 죄인. 비록 대청大淸 광서光緖에 나고
메이지明治, 다이쇼大正의 거상 입고
아마테라스, 쇼와에 절한 더러운 몸이언마는
건국 선거에 투표하는 날
조국은 나를 용납하여 불렀다
7월 17일 헌법공포식 중계 방송 듣고
흘린 감격의 눈물로 먹을 갈아
사는 날까지 조국 찬양의 노래를 쓰련다
그리고 독립국 자유민으로 눈감으련다
-「나는 독립국 자유민이다」, 「이광수 전집」9, 509쪽-
그 후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건국되었고 이 대한민국의 국회에서 9월 7일 '반민족행위처벌법'을 통과시키고 9월 22일 공포하였다. 그리고 춘원은 1948년 12월에 「나의고백」이란 책을 간행한다.
官公吏는 반민족자였던가
일본 순사보다는 조선인 순사가 낫지 아니하였던가. 「그놈 왜놈보다 더하다」는 악평을 듣던 형사도 일본인보다는 낫지 아니하였던가.
조선인 군수이던 고을에 일본인 군수가 올 때에 백성들은 싫어하지 아니하였던가. 아동들도 조선인 훈도나 교장을 더 좋아하지 아니하였던가. 판검사도 조선인은 조선인에게 인정을 두었다는 것은, 사상 사건을 조선인 판검사에게 아니 맡기는 것을 보아서 알 것이었다. 유치장이나 감옥의 간수도 조선인이 우리에게 사정을 보였다. 다만 그들은 일본인에게 의심받지 아니할 정도에서만 인정을 썼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불만이었던 것이다.
조선인 학교비 예산을 한 푼이라도 더하려고 애쓴 것은 조선인 도·부 회의원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무려나 나는 지난 사십 년 간의 경험으로 보아서, 조선인 관공리가 일본인보다는 민족에 해를 끼쳤다고는 생각지 아니한다. 그렇다 하면, 조선인 관공리가 많으면 많을수록 일정하 우리 민족의 실제 생활에 조금이라도 유리하지 아니하였던가.
또 조선인 관공리 치고 「나는 조선 민족을 배반하여서까지라도 일본에 붙으리라」하고 관공리가 된 사람을 상상할 수가 있었을까. 일본인에게 불신임받을 것이 두려워서 가장 충성을 보이고 조선인에게 냉혹한 모양을 보인 자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는 돌아서서 눈물을 흘리지 아니하였을까. 더구나 설운 일을 당하기로 하면 우리들 평민들보다도 조선인 관리들이 더하였다고 생각한다. 같은 학력을 가지고도 일본인보다 월급은 적어, 승진은 늦어, 대우는 나빠, 그들은 피눈물 고일 때가 많았으리라고 믿는다. 「그러고 왜 그놈의 종노릇을 해? 차고 나오지 못하고」한다면 그만이다. 그러나 한번 잡은 직업을 버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니, 참고 오래오래 견디는 동안에 고등관 삼등에 올라 가는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등관 삼등이라 하여 특별히 더 죄를 많이 주어야 할 이유는 없고, 도리어 일본인과 경쟁하여서 그렇게 불리한 조건 밑에서 그만큼 올라 갔으니 참을성도 솜씨도 있는 경험 있는 능력자라고 믿을 수가 있을 것이다. 사람 하나를 대학 교육을 시키고 고등 문관 시험을 치러서 고등 문관 삼등까지 끌어 올리기에는 수재로도 삼십 사오년의 세월이 걸리는 것이니, 진실로 고귀한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친일파의 손으로 지은 쌀이 식량이 될 수 있다면 일정 시대의 사무 능력이 대한 민국의 사무 능력이 아니 될 수도 없을 것이다.
어디나 악질인 자가 있는 모양으로 일정 시대 관공리 중에도 그런 자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두 포기 김을 없이 하기 위하여 밭 한 뙈기를 갈아엎을 것인가. 한번 반민족 행위자의 낙인이 찍히면 그는 다시 애국의 일을 못하게 될 것이다. 모모 농학 박사가 일본 시대에 장(長)이 되었다는 이유로 그 좋은 재주를 썩히고 있으니, 결과적으로 누구의 해인가.
-『이광수 전집13권』 중 「나의 고백」중 친일파의 변중 官公吏는 반민족자였던가 -
이 책은 반민특위가 정식으로 활동을 개시한 (1949. 1. 15)몇 달 전에 쓰여 진 것이다. 따라서 그의 운명이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는 상태에서 적은 글이라 할수 있다.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춘원은 제2차검거(문화계)가 시작된 1949년 2월 7일 서대문 형무소에 들어간다. 그 후 1949년 8월 27일 검찰관 9명중, 4대5로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그 후 1950년 6.25이후에 납북되어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Ⅲ. 결론
지금 까지 각 시기별로 춘원의 생애와 그때마다 춘원이 가졌던 사상들에 대해 알아보았다. 춘원 이광수만큼 한국 근대문학의 명암을 잘 드러내는 작가는 흔하지 않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춘원 이광수가 시대의 전면에 나서서 떠맡아야 하는 짐은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이광수는 무거운 책임의식과 함께 홀로 선각자의 길을 걷는다는 고독감마저 가졌던 것 같다. 그는 혼자 감당해야 하는 외로운 선택의 길이 자신 앞에 주어졌다고 느겼으며, 그 선택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민족의 지도자로 자처하면서 이광수는 변절의 길을 걸었고 그 길을 걷는 내내 민족을 위한다는 명분을 버리지 않았다. 이광수의 친일이 한편으로는 상황의 외압에 굴복한 것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 나름의 민족애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견해가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이광수의 문학 속에도 친일에의 길이 예비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광수뿐만 아니라 당시 문학을 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본의 정책에 자의든 타의든 협조를 했다. 그 당시 「2·8독립선언서」를 썼던 춘원이나 「3·1독립선언문」을 썼던 육당 최남선이 후일 변절의 길을 걸어 조선인들의 학도병 권유의 글을 썼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니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무정」에서 영채가 강간당하는 일을 버리지 못하는 얼룩과 같이 이 또한 우리가 버리지 못하는 우리 역사의 부끄러운 얼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 문헌
김윤식, 「이광수와 그의 시대」, 솔출판사, 1999
이중오, 「이광수를 위한 변명」,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9
김윤식, 「이광수 문학과 삶」, 한길사, 1986
송명희, 「이광수의 민족주의와 페미니즘」, 1997
한승옥, 「이광수: 비극적 세계 인식과 초월 의지」, 1995

키워드

춘원,   이광수,   무정
  • 가격2,300
  • 페이지수12페이지
  • 등록일2005.07.21
  • 저작시기2005.07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08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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