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민족해방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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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사회주의 수용의 조건

2. 초기 사회주의의 수용

3. 사회주의 이념의 확산

4. 조선공산당의 창당과 해체

5. 혁명적 노동조합․농민조합 운동과 당재건 운동

6. 중국 관내에서의 민족해방운동

7. 만주에서의 항일무장 투쟁

본문내용

서 반란사건의 발생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빈을 적군이 이용하면서부터 점차 투항하여도 엄중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대오 내부의 사상은 상당한 변화를 낳은 것이다. 즉 현재는 투항하여도 사형에 처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모두 알게 된 것이다.
위증민과 양정우는 정빈의 변절에 따른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제1로군 영도간부긴급회의’, 즉 제2차 노령회의를 열고 서정계획을 취소하였다. 또한 무장대오의 편제를 고쳐 기존 제1로군 제1,2군의 군, 사의 명칭을 해체하고 1,850여 명의 병력을 경위려와 3개 방면군으로 재편성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주력부대를 집안현 동북의 산악지대로 긴급히 이동시켰다. 이후 제1로군 제1방면군과 경위려는 양정우가, 제3방면군은 위증민이, 제2방면군은 군장인 김일성이 각각 지도하였다.
제2차 노령회의 이후 조직을 정비한 제1로군 주력부대는 삼림지대로 진출하여 일제와 전투를 벌이면서도 조직 내부의 동요를 방지하고 사상적 견고함을 제고시키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제1로군 군부와 당위에서는1938년 11월 남만성위 기관지 『레닌의 기치』(당, 군 간부 대상), 유격구 대중을 위한 『중국보』, 당원과 무장대오를 위해 위증민이 작성한 『정치독본』·『항일구국 천자문』을 각각 발행하였다. 또한 1939년 2월 화전현 두도류하에서 당원·간부 훈련반을 약 15일 가량 운영하면서 사상적 통일과 부대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노력하였다.
한편 제6사는 1938년 11월 ‘남패자회의’에서 제2방면군을 정식으로 편성하였다. 그리고 제2방면군의 주력은 오증흡(吳仲洽)의 제7단이 10여 차례의 전투를 전개하면서 일제를 압록강변으로 유인하는 가운데 일만(日滿)군경의 포위망을 뚫고 ‘고난의 행군’을 하여 다시 백두산지구로 진출하였다. 1939년 봄까지 백두산지구 밀림에서 군정학습과 휴식을 취한 제2방면군은 3, 4월에 장백현 북대정자와 대정자에서 각각 회의를 열고 필요할 때 병력을 집중하여 일만군경을 타격하며 국내진격과 백두산 북부지대로 진출한다는 방침을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제2방면군은 백두산지구 집단부락을 공격하여 각종 보급품을 준비하거나, 일만군경들과 치열한 항일전투를 수행하였다.
3) 역량보존과 조국광복을 위한 새로운 투쟁의 준비(1940∼45년)
제1로군에서는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1939년 10월 화전현 두도류하에서 두도류하회의를 개최하고, 실력을 보존하기 위해 유격대를 분산시켜 활동한다고 결정하였다. 이 방침은 1940년 3월 11일부터 5일간 화전현 두도류하에서 열린 제1로군 주요 지도자회의에서도 재차 확인되었다. 회의에서는 동만에 김재범(金在範) 등 5명을 파견하여 조직사업을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제1로군의 편제를 3개 지대, 즉 제1,4,7지대로 개편하고 백두산지구에서 계속 활동하기로 결정하였다. 동북항일연군에 대한 부대개편 방침은 1940년 1월 소련의 하바로브스크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길동성위, 북만성위 대표들의 회합(제1차 하바로브스크회의)에서 결정된 방침, 즉 실력을 보존하고 점차 부대 편제를 줄이면서 분산성을 극복하기 위한 조치의 일환으로 동북항일연군 각 로군을 10개 지대로 개편한다는 결정에 따른 것이었다.
제2방면군은 1940년 3월 이후 장백·안도·화룡·연길·돈화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그해 8월 10일 돈화현 소할바령에서 ‘소할바령회의’를 개최하였다. 회의에서는 당면 군사정치정세와 대중사업을 토론하고, 내부의 동요를 방지하고 일제의 탄압에 대응하기 위해 예하부대의 재편과 소부대별로 분산적인 전투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김일성을 포함한 제2방면군 주력은 ‘소할바령회의’ 이후 엄혹한 정세를 타파하고자 1940년 11월 6일 소련 영내로 이동하였다.
제2방면군 뿐만 아니라 동북항일연군의 모든 부대들이 가능한 한 소련 영내로 이동하려 했던 것은 당면정세에 비추어 대부대 활동을 중지하고 동북항일연군을 소련 영내로 이동시켜 부대를 정돈·훈련하기로 한 ‘제1차 하바로브스크회의’의 결정에 의한 것이었다. 당시 제1로군은 앞서 언급했듯이 내부의 동요와 편향된 투쟁방침, 무장투쟁 환경의 곤란함뿐만 아니라 분산된 소부대를 집중시킬 수 없었다. 또한 1940년 2월 제 1로군 군장 양정우의 사망, 같은 해 늦가을 제1로군 정위 위증민이 심장병 악화로 인해 유격활동을 정지하는 등 주요 지도역량들이 급격히 소실되고 있었다. 때문에 제1로군의 3개 지대로의 개편은 중·소국경지대를 넘어온 제1로군 병사 120여 명으로 1941년 3월 12일 하바로브스크 남야영(일명 ‘B야영’)에서 제1지대(대장 : 김일성)만을 편성하는 데 그쳤다. 지방사업의 경우도 김재범 등이 연길현 동북사 평성촌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김백산(제1로군 경위려 제3단 단장)의 밀고로 일제에 모두 체포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1940년 말경부터 개시된 동북항일연군의 소련 영내로의 이동이 무장활동의 정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동북항일연군은 무장대오의 지도핵심을 보존한 채 조직적인 퇴각에 성공하자, 1941년 1월 초부터 3월 중순까지 제2차 하바로브스크회의를 열고 무장부대를 정돈·훈련하며 15개 소부대를 조직하여 지하활동을 벌이도록 결정하였다. 또한 동북항일연군은 다음과 같은 임무를 수행하는 7∼8명, 또는 16∼17명으로 구성된 무장소부대를 만주지역에 남겨두고 있었다.
한편 소련영내로 이동한 동북항일연군은 하바로브스크와 블라디보스토크 부근에 각각 ‘북야영’(A야영)과 ‘남야영’(B야영)을 설치하고 부대를 정비하였다. 그리고 1942년 8월 1일 동북항일연군교도려를 조직하고 산하에 1천여 명의 병력으로 보병영(營) 4개, 박격 포련(連) 1개, 무선통신련 1개를 설치하였다.
이들은 새벽 6시에 기상, 밤 10시에 취침할 때까지 꽉 짜여진 훈련일정에 따라 바쁜 생활을 했다. 훈련 중에는 5분씩밖에 휴식시간이 없을 만큼 고된 편이었다. 훈련내용은 사격·행군·체육·제식·소부대교육 등이 주종이었고 낙하산 강하훈련까지 받기도 했다. 훈련은 대체로 소부대 단위로 진행됐고 여단 합동훈련 때에는 소련극동군 사령부에서 지휘관이 나와 직접 감독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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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11.15
  • 저작시기20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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