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기의 식민지 공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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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머리말 ♣

Ⅰ. 연구성과

Ⅱ. 조선인 기업의 발흥(1916~20년)
(1)식민지 경제
(2)조선인 자본의 동향

Ⅲ. 만성적 불황기(1920~33년)
(1)식민지 경제구조
(2)조선인 자본의 동향
(3)1931년 일제의 만주침략과 조선인 기업 활동

Ⅳ. 제2차 조선인 기업발흥기(1933~37년)
(1)식민지 경제구조
(2)조선인 자본의 동향

Ⅴ. 전시경제체제하 조선인기업의 성장과 몰락(1937~45년)
(1)식민지 경제구조
(2)조선인 자본의 동향

♣ 맺음말 ♣

본문내용

회사를 설립하여 해외진출을 하였다.
경성방직은 차입경영의 부담을 지고 있었고 설립 초기부터 꾸준히 일본 총독부의 보조금을 받은 이유와 식산은행에서 차입을 받은 이유로 인해 대륙침략에의 동조자라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김성수가 총독부 및 조선식산은행의 관리들과 두꺼운 인맥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점도 경성방직이 대륙침략 동조자라는 불명예를 얻는데 일조하였다.
@ 충남제사(주) - 중소자본
1926년 3월 23일 발기인 대표 성낙헌 등을 중심으로 충남제사의 창립총회가 열렸다. 충남제사는 순전한 조선인으로 구성된 경영진을 갖추고, 충남제사의 발기인들 자신들이 대주주로 있는 호서은행으로부터 특혜대출을 받기로 하고 조선인 자본만으로 회사 설립을 결정하였다. 1920년대 초반 제사업 부문이 전반적 호황이었고 고치생산량이 전국에서 3위인 충남에 아직 한 곳의 제사회사도 없었기 때문에 이들은 충남을 선택하게 된다. 충남제사는 1926년 조사기 108부로서 수출용 생사 제조를 시작한 중규모자본이었는데, 1929년 4월에는 조사기를 늘려 총 228부를 설치하는 등 규모를 확대해간다.
그러나 경영이 정상궤도에 진입하기도 전에 대공황이 발생하여 적자운영에 빠졌다. 당시 대공황은 제사업계에 큰 타격을 주었다.
충남제사는 계속되는 생산성 저하와 적자로 인하여 이후 심각한 경영위기에 봉착하였다. 이는 자본의 열세, 경영의 후진성 등에도 원인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일제의 식민지 경제정책으로 인한 필연적 결과였다. 1929년 ‘은행령’개정으로 한일은행과 합병, 동일은행으로 재편된 호서은행의 정리는 운영자금을 차입금으로 마련하는 취약한 재무구조를 갖는 충남제사에게 결정적 위기였다. 또한 독점자본 중심의 대공업 지배체제 구축에 따른 선별적 지원 정책에서 조선인 중소자본은 제외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충남제사는 1933년부터 일본 제사독점자본인 삼정물산으로부터 금융지원을 받게 된다. 삼정물산의 직원 김동경이 경영에 참가하게 되면서 1936년부터 경영형태가 바뀌게 되었다. 충남제사는 더 이상 일본 독점자본의 이해관계로부터 독립적인 경영 구조를 가질 수 없게 되어 식민지 수탈체계에 편입ㆍ예속되었다.
1941년 창립 1세의 퇴임과 1942년 창립 2세대 성원경의 탈락을 끝으로 창립 주체들의 영향력이 완전히 소멸되고, 김동경이 총 경영을 맡게 된다. 1941년 이후 충남제사는 국책 기관인 조선잠사통제의 계획생산, 배급통제, 가격안정이라는 3대 통제원칙하에서 생산통제와 가격통제를 받았다. 이에, 충남제사는 군수산업체로 전환하여 기업을 계속 유지하였다.
맺음말
지금까지 조선 경제와 조선인 자본 동향에 관해 살펴보았다. 이전까지의 이러한 연구는 개발/수탈이라는 이분법적 인식 안에서 진행되어왔다. 우리는 항상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가 식민지를 ‘개발’했는가 ‘수탈’했는가를 질문하였다. 그리고 수탈을 강조한다든가 혹은 개발을 강조한다든가 하는 방식으로 또는 개발 측면과 수탈 측면을 양적으로 비교하여 개발의 측면이 더 많으면 식민지 지배가 ‘근대적’인 것으로 수탈의 측면이 더 많으면 ‘약탈적’인 것으로 평가하였다.
그러나 연구의 진전을 가로막는 것은 개발/수탈이라는 이분법적 인식이었다. 왜냐하면 개발과 수탈을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는 자본주의화를 가져오고 자본주의화는 언제 어느 곳에서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개발과 수탈을 동시에 낳는다. 이것은 조선인 자본의 성장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인데 일제의 공업화를 통해서 조선인 자본이 성장하지만 이후 조선인 자본은 일본 독점자본에 의해 수탈된다.
이러한 점을 생각할 때 개발/수탈이라는 이분법적인 인식보다는 제국주의 구조라는 종속의 구조와 모순으로 조선인 자본을 생각해야 될 것이다. 조선인 자본은 일본 독점자본이 주도하던 틈새에서 성장을 모색하기도 했지만 점차 결정적인 한계를 드러낸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전시체제하에서 전황이 악화되면서 조선인 자본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적극적으로 반영할 수 있는 정책운용에 개입할 여지도 능력도 없이 일본 또는 조선총독부가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전쟁동원 정책에 절대적으로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군수업종에 관련을 가지면서 기업을 유지하거나 부를 축적한 극소수를 제외하면 조선인 자본의 대부분은 결국 기업 정비 단계에서 도태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스스로 주체가 되어 역사의 전면에 사회를 이끌어가기보다 민족의식을 버린 채 일제에 예속된 가운데 모색한 부의 축적은 결국 성공적이지 못했고, 사회 구성원에 대한 사회적ㆍ정치적 리더십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점은 한국 자본가그룹이 안고 있는 본질적 한계로서 오늘날까지 불식되지 못한 자본가그룹의 천민성ㆍ부패성ㆍ대외의존성은 이러한 역사적 연원에서 배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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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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