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의 시대적 의의와 반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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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동학농민혁명의 시대적 의의와 반향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들어가며

2. 동학농민혁명의 배경적 측면
(1) 역사적 배경
(2) 시대적 배경
(3) 사회적 배경
(4) 계층의 분화

3. 동학농민혁명의 전개
(1) 고부 농민 봉기
(2) 제1차 농민전쟁
1) 농민봉기와 전주성점령
2) 전주화약
3) 집강소단계
(3) 제2차 농민전쟁

4. 동학농민혁명 후의 사회변화와 역사적 의의

# 참고문헌

본문내용

성논산 방면으로 후퇴하였다. 10,000여명의 병력 중에 남은 것은 500여 명에 불과 하였다. 농민군은 일본군의 추격을 받으면서도 계속 전열을 정비하여 저항하였으나 패배를 거듭할 뿐이었다. 이후 후퇴를 거듭하여 전주, 태인을 거쳐 전라도 남단까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전봉준은 일단 남쪽으로 후퇴하여 머물면서 +동학군의 전열을 가다듬은 다음 재봉기를 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전봉준이 수명의 동지들과 함께 순창으로 피신하여 있을 때, 현상금을 탐낸 한신현 등 지방민의 급습으로 12월28일에 피로리에서 붙잡혀 한양으로 압송된 후 이듬해인 1895년 3월에 사형 당하고 말았다. 한편 교주 최시형은 공주에서 일본군의 혼성군과 싸워 참패한 뒤 논산을 거쳐 장수 등지에서도 패하고 영동, 청주로 피신했다가 1898년 원주에서 송경인에게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된 후 사형 당했다.
4. 동학농민혁명 후 사회변화와 역사적의의
이리하여, 안으로는 양반 중심의 봉건 체제에 대항하고, 밖으로는 외국 자본주의의 침략에 대항하여 싸운 동학혁명은 결국 그 양자의 연합세력에 의해 실패하고 말았지만 이 결과로 대내적으로는 1894년의 갑오개혁이라는 내정 개혁을, 대외적으로는 청일 전쟁을 유발시킨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우선 주목받을 사건이었다. 그러나 농민혁명의 역사적 의의는 그런 외형에 있는 것이 아니라, 농민혁명의 내용 그 자체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의와 그 후 지금까지 100년에 면면히 흐른 정신은 무엇인가? 통치 질서가 파탄에 처하고 일본 등 열강의 침탈이 자행되던 19세기말, 조선은 크게 두 가지 과제를 안고 있었다. 안으로는 낡은 신분 지리서를 뜯어고치고 모든 민족 구성원이 평등의 원칙 아래 자유를 누리며 역사에 참여할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해 가는 개혁, 즉 근대화가 필요했다. 밖으로는 이런 내적인 역사발전을 해치는 외부로부터의 힘에 대응하는 것, 즉 자주화가 필요했다. 말하자면 당시 조선은 침략을 배격하는 자주적 입장에서 사회적 개혁을 이룩해야 했다. 이 시대적 과제를 실현하지 못하는 한, 조선은 어떤 형태로든 몰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런 과제에 부응하기 위한 위정자들의 고민과 노력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양반지배층의 위정척사(조선 말기에 정학인 주자학을 지키고 사도를 물리치자는 유교의 벽이단 이념)운동과 개화지식인들의 개화운동이 그런 맥락의 노력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운동은 모두 명백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양반층은 위정척사운동을 통해 자주권을 수호하고자 했지만 사회개혁은 반대했다. 개화세력은 개화운동을 통해 근대화를 실현하고자 했지만, 외세의 본질을 간과하고 침략세력과 결탁했다. 이런 한계 등으로 결국 두 운동은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리하여 사회적 모순과 외세의 침탈로 인한 폐해는 더욱 심각해 졌고, 그 최대 피해자인 농민들이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 나선 것이 바로 동학농민혁명이다. 그런 점에서 동학농민혁명은 실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한, 시의 적절한 대응이었다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세상을 향한 농민 대중의 일대 항쟁인 동학농민혁명은 그렇게 시작되어 1894년 한해 동안 한반도 전역에서 전개되다가 30~40만 명의 희생자를 내며 끝났다. 그런데 이 혁명의 전개과정은 우연히도 우리의 한 해 농사와 꼭 닮았다. 농민혁명의 씨앗이 뿌려진 동학공인운동 기간은 해빙에, 고부농민봉기는 봄의 파종에, 3월 봉기는 여름의 경작에, 집강소 설치 및 재봉기 단행은 가을의 결실에, 그리고 9월 재봉기의 좌절은 농부가 떠난 황량한, 그러나 새로운 농사를 가다리며 힘을 비축하는 들판에 견주어 봄직하다. 농민혁명 과정에서 농민군은 전근대적 모순과 부패의 척결 즉, 근대적 사회개혁을 요구하고 실현하고자 했다. 경제적으로는 조세 수취제도의 개선 등을 통해 영세한 농민과 상인, 수고업자 등 직접생산자들의 자립과 발전을 꿈꾸었다. 정치적으로는 왕정체제의 개선을 희망했다. 나아가 농민군은 일제의 침략이라는 민족적 위기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며 항일민족운동을 전개했다. 한마디로 동학농민혁명은 당시 조선이 안고 있던 절체절명의 과제, ‘사회개혁과 외세치탈 배격 = 자주 근대화(반봉건 반외세)’를 이루려 한 농민들의 일대 항쟁이었으며, 우리 근대사의 성패를 가르는 사건이었다. 국가와 민족의 뿌리인 농민들의 대 항쟁은 불행하게도 일제의 무력에 의해 좌절되고 말았다. 그래서 이 사건을 흔히 실패한 혁명이라 말한다. 그러나 우리 근대사의 큰 맥락에서 보았을 때, 이 사건은 광무년간의 사회개혁 및 항일운동의병전쟁3.1만세운동상해임시정부광복군 활동 등 농민혁명 이후에 전개되는 숱한 민족운동의 조직적이념적 수원지였다. 18세에 동학 접주가 되어 이듬해 황해도 농민군의 선봉장을 맡은 것을 시작으로, 이후 일본인밀정 살해, 신민회 및 상해 임시정부 활동, 광복군 조직등 민족지도자의 길을 걸은 백범 김구의 생애가 이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동학농민혁명은 현대에 전개되는 여러 민주화 운동, 즉 4.19 의거5.18 광주민주화항쟁 등의 정신적 본령을 이룬다. 그런 점에서 농민혁명은 끝내 실패로 마무리된 사건으로만 평가할 수 없다. 이 사건은 사회의 변화와 발전에 대한 대중적 요구가 제대로 수용되지 못할 때, 그 공동체가 어떤 처지로 전락하는지를 현재의 우리에게 생생하게 보여 주는 경험이자 역사로 남아있다.
★ 참고 문헌 ★
1. 한국 정치외교 사학회, 갑오동학농민 혁명의 쟁점, 집문당, 1994
2. 한국 민중사 연구회, 한국 민중사Ⅱ - 근현대편 -, 풀빛, 1986
3. 역사학 연구소, 농민전쟁 100년의 인식과 쟁점, 거름, 1994
4. 원종규외, 갑오농민전쟁 100돌 기념논문집, 집문당, 1995
5. 망원 한국사 연구실 한국근대 민중운동사 서술분과, 한국 근대 민중운동사, 돌베게, 1989
6. 신용하, 한국 근대의 선구자와 민족운동, 집문당, 1994
7. 민중사상연구소, 한국 근대 민중사, 민중사, 1988
8. 강만길, 한국근대사, 창작과 비평사, 1984
9. 강만길, 고쳐쓴 한국근대사 창작과 비평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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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11.30
  • 저작시기20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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