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권과 한국 70년대 경제 개발 정책의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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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박정희 정권과 한국 70년대 경제 개발 정책의 특징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서문

1)중화학공업 우선정책

2)재벌체제

3)개발독재체제

4)유신체제

5)방위산업

6)새마을운동

결론

본문내용

소득증대와 문화적 생활수준의 향상, 비물질적 측면에서 근대적인 ‘책임의시과 협동의식의 고취’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에는 문제가 있다(내무부,1980:제5장). 실재 새마을사업 추진 실태와 성과에 비춰볼 때 이런 유의 해석은 사실과 별로 부합되지 않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이런 점들에 비춰본다면 1970년대 농촌새마을운동은 농가의 소득증대나 문화적 생활수준의 향상이라는 공식적 평가와는 거리가 먼 ‘황경개선’과 관련된 공동사업에서 ‘제한적으로 성과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성과가 ’제한적인‘ 이유는 영세 소농층 위주의 농촌마을이 새마을운동 덕분에 개별 농가 단위로 도시 시장권 상품경제에 본격적으로 편입ㆍ통합되어감에 따라 절대적인 빈곤 상태를 탈피하게 되었고, 농로확장사업을 비롯하여 공동의 마을숙원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개발의욕이 형성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해에 밝은 농민들에게 실리가 없는 공동생산사업이나 소득증대사업들은 요란한 구호일 뿐 시간이 지남에 따라 농촌 근대화의 유효성이라는 점에서는 점차 소멸되었다. 특히 새마을운동이 비판받을 수밖에 없는 가장 큰 문제는 새마을운동 기간에 새마을사업에 동원될 수 없거나 새마을사업을 통해 이득을 얻기 어려운 소농 및 빈농의 경우에는 아예 농촌을 떠날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마을 운동의 필요성과 그 유효성은 이러한 역부족을 새마을 운동이라는 상징과 대중동원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던 그것도 농촌이 근대화‘가 아니라 1968년부터 가속화된 ’산업화‘를 위해 농촌을 체계적으로 동원하고자 했던 동원이데올로기의 연장선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결론
중화학공업의 성장은 국민총생산의 구성과 수출구성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그 기간 중에 의도적인 정책개입이 한국경제의 중요한 요소로 존재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런 맥락에서 시장에 대한 순응을 강조하고 정책 개입의 효과를 과소평가하려는 기존의 연구와 다르게, 특정 산업구조에 대한 집단적인 의도와 산업구조 변화간의 관련성을 생각해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한국이 경험한 산업발전단계의 비연속적 도약이 금융 및 산업정책을 통한 정부개입 없이는 불가능했다는 것은 명백한 것 같다.
또한 중화학공업 우선정책, 재벌체제, 개발독제체제, 유신체제, 방위산업, 새마을운동이 여러 가지 면에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경제 개발과 중화학공업 우선정책, 재벌체제, 개발독제체제, 유신체제, 방위산업, 새마을운동 등을 하나씩 따로 놓고 생각해본다면 유신체제는 억압적이고 비난받아 마땅한 면이 많이 있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본다면 이러한 정책들이 유기적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면에서 단순히 어는 한편에서 그 문제를 다루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고 생각된다.
박정희는 다음과 같은 일들을 이루었다.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룩하여 약 20년간의 통치기간에 국민소득을 87달러에서 1,644달러로 약 19배로 끌어올림으로써 부정할 수 없는 ‘한국 경제기적의 주역’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리고 새마을운동 같은 제도개혁을 통하여 빈궁한 농촌사호의 기근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어떻게 보면 역설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박정희 정권은 비록 민주화 운동을 억압하였지만 경제발전을 통해서 오늘날의 한국 다원주의의 근간이 되는 중산층을 창출함으로써 한국 민주주의에 기여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또한 정치와 정부의 부패에 관한 기록들을 돌이켜보며 상대적으로 논의할 때, 다른 어는 정권, 특히 박정희 사후 그를 계승한 정권들에 비하여, 박정희 정권은 그 부패의 정도가 상대적으로 덜했다고 불 수 있다. 그러나 박정희의 리더십은 한국의 경제발전과 근대화의 역사적 달성을 가능케 하였지만, 리더십 구조와 권력승계를 제도화하지 못함으로써 개혁과 정책의 계속성을 확보하지 못했고, 거기에 전통적 통치스타일의 인간관계와 네트워크에 크게 의존했다는 결함이 있다. 일본식 군사교육을 받은 사람으로서 박정희는 측근 군부인맥으로부터 스스로를 빠져 나오지 못했다. 특히 말년으로 가면서 자기를 과신하게 되었고, 통치그룹의 핵심을 형성하고 있던 군 동료들 및 부하들에게 크게 의존하였다. 또한 한국의 자본주의적 국가발전의 성공도 자체 내에 파괴의 씨앗을 가지고 있었다. 즉, 박정희시대 이후의 기업인들과 경제계의 지도자들이 미래에 대한 비전 없이, 자신들의 에너지를 박정희시대에 시작되었던 생산적인 패러다임을 최소한 지속할 수 있도록 젊은 지도자들의 양성에 투자하는 대신에, 그들 자신들의 기업이나 개인적 이익을 확장하는 데 소비하고 말았다.
또한 박정희 경제개발체제는 경제개발의 이익이 국민들에게 고르게 분배되기 보다는 성장을 우선한다는 명분하에 국민들이 함께 이룩한 경제 성장의 결과물을 다수의 국민들에게 돌려주기 보다는 소수의 재벌들에게 결과물을 돌려주는 형태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지금 현시점에서도 그대로 이어져오고 있다. 그리고 경제개발과 국가 안보에 치중하여 국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억압하고 4.19에서 나타난 국민들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20년 가까이 억압하였고 그의 사후 군부에 의한 가혹한 억압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성장에 가치를 둔 박정희의 정책보다는 민주화에 가치를 두는 것이 좀더 옳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만족할만한 성장과 민주화가 함께하는 길을 모색해보는 것이 앞으로 필요하겠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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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규(2004) [박정희 모델과 신자유주의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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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종규, 이춘근(2001) [한국 경제 이야기]
박태균(2004) <1970,80년대 경제정책 주체의 변화와 새로운 경제 담론>
김영순(1988) <유신체제의 수립 원인에 관한 연구(정치경제학적 접근)>
정관용(1988) <중화학공업화정책을 통해 본 한국의 국가성격>
류재헌(1991) <한국 산업독점체 형성과 금융적 자본의 관계>
한도현(1991) <1970년대 농업ㆍ농촌 정책의 전개과정을 통해서 본 국가의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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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12.13
  • 저작시기20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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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3266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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