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의 대학과 고려 교육기관의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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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대학과 고려 교육기관의 비교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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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었다. 교황권은 지적, 제도적 근대성을 과감하게 편들면서 어디에서나 대학의 자율성을 보장했고, 심지어 그들 스스로 규정한 목표에 궁극적으로 부합한다면 기독교 전역에 미치는 교리를 해석할 수 있는 권한이 대학에 있음을 인정해주기까지 했다. 이로 인해 대학제도의 시작부터 이미 대학 자율성이 보장되었다.
1230년경에도 대학들은 여전히 소수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 최초의 대학들은 일찍이 상당한 명성을 얻었고, 오늘날에도 가장 유명한 대학들에 속한다.
처음에는 단순했던 대학제도는 점차 복잡해졌고 14세기초에야 완전한 규정들이 만들어졌다. 파리에서는 1250년 이후에 조직된 학부들이 나타났다. 파리 대학은 예비학부인 교양학부와 상급학부인 의학부, 교회법학부, 신학부로 구성되었다. 너무 세속적인 것으로 판단된 민법학부는 1219년 금지되었다.
상급학부들은 각자의 학부장이 지도했다. 가장 사람들이 많았던 교양학부의 경우 선생들과 학생들이 출신지에 따라 네 '동향단'(프랑스, 노르망디, 피카르디, 잉글랜드)으로 재편되었다. 1245년경 이 동향단들의 수장으로 선출된 학장이 등장했다. 그는 대학 전체의 지도자였지만 임기가 3개월인데다 동향단들과 학부들 전체가 모이는 총회가 더 큰 권한을 행사했기 때문에 역할이 제한되었다.
마지막으로 칼리지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1257년 콜레주 드 소르본처럼 칼리지들은 처음에는 단순히 가난한 학생들에게 숙소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대학이 분쟁과 위험으로부터 안전한 피신처였던 것만은 아니다. 지역의 교회와 세속 권력은 이제 대학의 자율권을 인정했지만 대학과 도시주민들의 충돌은 빈번했다.
교황권 역시 대학의 일에 자주 개입했다. 교황권이 전반적으로 호의를 가지고 대학 구성원들에게 집단적, 개인적으로 혜택을 베풀었다고 해서 교육의 정통성을 감시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1217년부터 교황권은 대학들, 특히 파리 대학에 새로운 탁발교단들, 즉 도미니크 수도회와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수도사들을 받아들이게 했다. 교황은 이 탁발수도사들에게 이단에 대한 투쟁과 도시지역 선교를 맡겼다.
처음에는 환영받았던 탁발수도사들은 자신들의 교수와 나름대로의 학교를 갖추게 되면서 세속인 동료들에게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되었다. 그들의 수준 높은 교육은 질투를 불러일으켰다. 게다가 그들은 대학의 자율성에는 거의 신경 쓰지 않으면서 고위성직자와 교황에게만 복종했다. 대학이 이들을 내쫓으려 했을 때는 이미 늦어서, 교황의 지원을 받고 있던 탁발수도사들은 강력히 저항했다. 파리에서 옥스퍼드에 이르기까지 분쟁이 여러 차례 발생했지만 언제나 탁발수도사들에게 유리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이들이 진정으로 대학의 자율성에 해를 입혔다고 말할 수는 없다.
(7) 대학의 기여
중세 대학이 행한 문화적 공헌은 몇몇 위대한 선생들의 혁신적인 교리에 국한되지 않았다. 최소한의 성실성을 가지고 대학에 다녔던 사람들에게 대학은 적어도 매우 굳건한 '기본적 교양', 즉 엄밀하게 추론하는 방법, 텍스트를 세밀하게 분석하는 기술, 그리고 일관된 세계관의 개략적인 관념들과 요소들을 제공했다.
12, 13세기 이후 중세 사회에서 이 '기본적인 교양'의 비중은 더욱 커졌다. 그리고 대학 학위 보유자라는 좁은 집단에서 벗어나 더 멀리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정확히 추산하기는 어렵지만 학위 없이 대학을 떠났을 것이 분명한 대다수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그들이 경력은 그리 화려하지는 못했겠지만 교육받은 것의 일부를 간직하고 있었을 것이다. 또 졸업생들의 사회적 활동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자. 신학석사의 강론, 판사나 변호사가 된 법학박사의 판결이나 의견, 의사의 진단, 작은 라틴어 학교의 교장이 된 문학석사의 수업들은 결국 더 많은 사람에게 대학의 교리와 지적 실천의 결과물을 전해주었을 것이다.
이처럼 학업을 통해 얻은 능력은 인정을 받았다. 물론 출생이나 실제적인 경험에 근거한 능력들과 계속 경쟁해야 했지만 말이다. 중세의 대학은 서유럽에 '지식인'이라는 사회적 존재를 태어나게 해준 것이다.
3. 맺 은 말
몸말에서 서양의 중세의 대학들이 갖고 있었던 특징들과 제도 등이 정비되는 과정, 그리고 대학이 갖는 가장 중요한 특징인 자율성을 어떤 배경으로 주어졌는지 그리고 이러한 대학이 유럽에 기여한 바를 알아보았다.
대학은 자율성이라는 면에서 학교와 차이점을 가진다. 그리고 이런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중세에서 근대로 가는 데 많은 기여를 하게 된다. 특히 지식인층의 형성에 기여했다. 이 지식인들은 절대왕권시대에 관료의 역할을 하게 되며, 근대화 과정 중간 중간에 있는 혁명에도 깊숙이 관여하게 된다. 즉 지식인들이 중세 말과 근대를 이끄는 세력으로 나서게 되고 이는 결국 중세 말에 파생되었던 대학이 이를 이끌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이는 비슷한 시대의 고려의 교육기관들과 비교될 수가 있다. 고려 시대의 대표적인 교육 기관으로 국자감과 12도를 들 수 있다. 우선 고려의 교육 기관은 과거제를 목표로 교육을 했다. 동양에 있던 과거제는 관료를 등용하기 위해 더 없이 좋은 제도이긴 했지만, 그로 인해 학문의 폭이 국가에 의해 제한되어졌다. 마찬가지로 교육 방법, 교육 제도 등이 국가에 통제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부터 대학의 가장 큰 특징인 자율성을 갖출 수가 없었다.
그리고 또 고려의 교육 기관이 자율성을 갖지 못했던 이유는 서양의 대학이 교황이라는 국가 권력과 필적할 만한 권력에 후원을 받았던 것에 비해 고려 시대에는 이러한 권력이 존재하지도 않았고 그런 권력을 존재했을 때도 자율성을 주기 보다는 자기가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기에 급급하였다.
서양의 중세의 대학들은 주어진 자율성과 더불어 그 자율성을 지키기 위해 투쟁까지 불사하여 자신의 자율성을 지켜내었다. 그리고 유럽이 근대로 나아가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할 수 있었다.
※ 참고 문헌
중세의 지식인들, 자크 르 고프, 동문선, 1999
서양중세문명, 자크 르 고프, 문학과 지성사, 1999
대학의 역사, 크리스토프, 한길사, 1999
서양사 입문, 조경래, 일신사, 1983
대학문화사, 김기동, 형설출판사,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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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12.15
  • 저작시기20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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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327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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