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강 정철의 시 세계 연구
본 자료는 9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해당 자료는 9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9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차

1. 송강 정철의 생애

2-1. 송강 정철의 대표작품
2-2. 송강 정철 작품에 나타난 성격 및 특질

3. 주제별 작품분석

4. 서포 김만중의 비평

5-1. 대표작 관동별곡
5-2. 대표작 관동별곡에 대한 고찰

6. 송강 정철의 유적지

본문내용

미지가 어떻게 다른가 하는 점이다. 먼저 산을 보면서 떠올린 것은 백색의 이미지이다. 백색 이미지는 '성스러움', '고결', '승화' 등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고결성의 바탕은 시적 화자가 그런 위치에 있다는 점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위정자로서의 모습과 생각을 나타내는 표현들이다. 그러나 바다를 향해 가면서부터 시적 화자의 모습은 일변한다. 그 자신을 취선(醉仙)으로 표현하면서 천연으로서의 인간의 모습을 드러낸다. 산에서 억제되고 다듬어진 위정자 또는 지식인으로서의 얼굴이, 바다에 이르러서는 인간 의식이 저 밑에 있는 본연의 모습을 드러낸다. 인간 내면에 있는 이 두 모습은 마침내 갈등을 일으킨다. 이 점에서 이 노래는 단순한 기행 가사가 아니라 인간 내면에 깃들여 있는 두 얼굴의 표백(表白)이며, 그 갈등의 함축적 표현이라는 의미를 가지게 된다.
(4) '관동별곡'에서 '공간의 이동(산에서 바다로의 나아감)과 작자의 내면 변화
산에서는 사회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하는 열망[목민관으로서의 책임감]을 주로 그리고 있다. 그러나 바다로 접어 들면서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면서 내면의 깊이로 향하는 전환을 보이고 있다. 산이 간직하고 있는 덕성을 본받아 실현하는 것은 작가의 의무이고 이상이며 목표였다. 그러기에 산의 경치를 노래하되 신하로서의 직분, 목민관으로서의 의무감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런데 바다에 와서는 사회적인 의무보다는 현실을 초월하고 싶은 개인적 욕망을 드러내는 데 초점이 놓여 있다. 산을 보고는 곧고 변함없는 덕성을 본받고자 하고, 끝없이 넓게 펼쳐진 바다를 보고는 무한한 내면의 세계로 침잠하고자 했다.
(5) '관동별곡'에서 갈등의 양상과 극복
지은이는 관찰사로서의 공식적인 임무와 자연을 마냥 즐기고 싶은 신선적인 풍류 사이에서 갈등을 하고 있다. 이러한 갈등이 신선과 만나는 꿈 속에서 해결되고 있는데, 우선 술을 모든 백성에게 고루 나누어 마시게 한 후에 다시 만나 또 한 잔을 하겠다는 말 속에서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과 자신의 회포를 풀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드러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연에의 몰입, 도취를 추구하는 도교적 신선 지향과 충의, 우국, 애민 등을 지향하는 유교적 충의 사상의 대립과 갈등을 드러내지만 도교적 신선 지향성은 연군의 정, 애민 사상, 우국적 감정에서 연유된 관찰사의 소임에 대한 강한 자각에 의하여 극복된다.
(6) '선우후락(先憂後樂)'
'이 술 가져다가 ~ 쟘고야.'에서 취중에도 좋은 것을 백성과 같이 즐기고자 하는 송강의 애민 정신과 선정(善政) 포부가 느껴지는데, 이는 '선우후락(先憂後樂)'의 정신이다. 송나라의 범중엄(范仲淹)이 쓴 '악양루기(岳陽樓記)'의 끝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다.
"어진 이는 외물(外物)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않으며, 자기 개인의 일로 슬퍼하지 않는다. 조정의 높은 지위에 있을 때에는 그 백성을 위해 걱정하고, 지방에 멀리 떠나 있을 때에는 그 임금을 위해 걱정하게 되니, 이것은 조정에 나아가 벼슬을 하고 있을 때에도 걱정이고, 물러나 있을 때에도 또한 걱정인 것이다. 그러고 보면, 어느 때에 즐거운 것인가? 그는 반드시 천하[백성]가 걱정하는 것을 앞서 걱정하게 되며, 천하가 즐거움을 누린 뒤에야 즐거움을 누린다고 하리라. 아, 이런 사람이 없으면, 나는 누구를 좇아 함께 갈 것인가?"
6. 송강 정철의 유적지
(1) 시비(삼척의 '죽서루')
(2) 묘 송강사(松江祠)(지방문화재 제9호, 충북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 은골)
- 정송강사 : 송강의 위패를 모신 곳. 유물전시관, 신도비각, 송강묘소 등이 있음
(3) 송강 정철 선생시비(송강사 입구소재) : '사미인곡' 일절 새김
(4) 송강 3대 유적지 : 환벽당, 식영정, 송강정(전남 담양)
[송강 정철 3대 유적지 탐방] 어느 날, 김윤제가 환벽당(環碧堂)에서 낮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는데, 조대 앞 물에서 용 한 마리가 승천하는 내용이었다. 잠에서 깨어난 김윤제가 급히 조대로 내려가자 그곳에서 한 소년이 미역을 감고 있었다. 김윤제는 소년의 용모에 반해서 외손녀를 그 소년에게 시집 보냈는데 바로 그 소년이 정철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시비가 환벽당 마당에 있지 않고 조대에 세워져 있는 것이다. 시비에는 <성산별곡> 중에서 조대와 소(沼), 그리고 환벽당이 나오는 부분을 새겨 놓고 있다. 지금은 수량이 풍부하지 않지만 송강이 살았던 시절에는 배를 띄워 낚시도 하고 미역을 감을 정도로 물이 깊었으며, 갈대가 우거져 강호의 풍경이 아기자기했을 듯싶다. 환벽당은 담양군과 광주 광역시 접경 지역에 있는데 엄밀하게는 광주시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식영정(息影亭)은 환벽당의 맞은 편 300미터쯤 떨어진 성산에 있다. 식영정은 담양군 남편 지곡리 성산이다. '식영'을 직역하면 '그림자도 쉰다'는 말이지만, 원래의 뜻은 '숲에서는 그림자가 없다.'라는 뜻이다. 말하자만 세속을 떠나 자연에 묻혀 사는 삶을 뜻하는 낱말일 것이다. 어쨌든 식영정은 임억령을 위해 김성원이 1560년에 지은 정자인데, 송강은 여기서 머무는 동안 주변의 경관을 관조하면서 <성산별곡>을 지었다고 한다. 정자 주변에는 목백일홍 꽃이 한창이고 검은 오석의 시비에는 성주본 <성산별곡>이 새겨져 있다. 주위에는 부용당과 송강의 가사가 양각된 목판 일부를 보관하고 있는 각(閣)도 있다. 소쇄원(瀟灑園)은 식영정에서 승용차로 5분 정도의 거리에 있다. 보길도의 부용동 원림과 더불어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원림인 이 정원은 사적 제304호로서 양산보가 은사인 조광조가 남곤 등의 훈구파에 몰리어 전라도 능주로 유배되자, 자신도 입신 양명의 길을 버리고 하양, 은거했던 곳이다. 여기서 다시 송강정으로 가려면 담양군 봉산면 쌍교까지 가서 다리를 건너지 말고 왼쪽으로 꺽으들면 된다. 송강정은 정철이 동인(東人)들에게 몰려 대사헌의 자리에서 물러난 후, 하향하여 머물렀던 정자다. 당시에는 노송과 참대가 무성하여 '죽록정'이라고 불렀으나 후손들이 1770년에 증축을 하면서 송강정으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송강은 이곳에서 <사미인곡>을 지었다고 하며, 그래서인지 이곳의 시비에는 <사미인곡>이 새겨져 있다.

키워드

  • 가격2,500
  • 페이지수28페이지
  • 등록일2005.12.29
  • 저작시기2005.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30190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