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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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권문세족의 성립과 그 성격
(1)세족층의 형성과 그 특징
(2)고려 후기 권력구조와 세족
(3)고려 후기 사회모순의 심화와 세족층의 동향
(4)고려 후기 세족의 역사적 성격

2. 신진사대부의 대두와 그 성격
(1)신진사대부의 대두 배경
(2)사대부의 성격과 용어에 대한 논의
(3)사대부의 성격과 시기구분

3. 개혁정치의 추진과 신진사대부의 성장
(1)개혁정치의 추진
(2) 개혁정치의 성격
(3) 신진사대부의 성장

본문내용

의 신진사대부는 이제현을 중심으로 세력을 결집하고 있었다. 신돈 정권이 등장했을 때는 이를 중심으로 신진사대부의 세력이 강화되었다. 신돈정권기의 대표적인 개혁사업으로 평가되는 전민병정사업과 국학 중흥책은 이미 이색등 신진사대부에 의해서 제안된 것이었다는 점에서 이 시기 개혁에는 신진사대부의 역할이 컸음을 알 수 있다.
공민왕 16년, 국학의 중흥을 표방하면서 추진된 교육개혁은 신진사대부가 세력을 결집하고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신진사대부의 내적 구성과 주도세력의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다. 공민왕이 이색을 대사성에 발탁하여 신진사대부의 구심이 이제현에서 이색으로 이동하는 등 일정하게 세대교체가 이루어졌다. 이처럼 이색을 중심으로 하는 신진사대부는 신돈정권기 개혁정치에 참여하여 정치세력을 형성하고 그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그래서 신진사대부의 상당수는 개혁정치에 참여하면서 자기성장을 이루고 있었으며 신돈이 몰락하는 공민왕 20년 경에는 중견관료로서 인사권을 장악하고 요직을 역임하는 등 괄목할 만한 정치적 지위를 확보하게 된다.
이제현과 그의 문생인 이색을 중심으로 하는 공민왕대 신진사대부는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이들은 좌주·문생관계 등 과거를 매개로 결속되어 있었고 세족출신 사대부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사대부층 내에서 이러한 관계는 공민왕대 이전에도 유지되어 온 바이지만 그 주도적인 역할에 변화가 나타나 신진사대부가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신진사대부는 대부분 주자성리학을 사상적 기반으로 삼고 있었다. 또 공민왕대 사대부는 농업기술의 진흥에도 관심을 갖고 있었다.
공민왕대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성장한 신진사대부는 우왕대 이인임 정권이 등장하면서 시련을 겪어야 했다. 이인임정권은 족당 세력을 형성하면서 장치권력을 장악하고 경제적 부를 독점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인임 족당 세력을 제외한 정치 세력들은 정치권으로부터 소외되고 있었다. 뿐만아니라 우왕대 더욱 잦아진 왜구의 침입도 신진사대부의 정치활동을 위축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우왕대 14년간 378회에 달하는 왜구의 침입으로 당시 정국은 전시 체제로 운영될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정치상황은 신진사대부의 활동공간을 축소케 하였을 것이다.
우왕 원년 북원 사신의 영접 문제를 둘러싸고 신진사대부와 이인임 세력간의 정면 대결이 가시화 되었다. 신진사대부들은 이인임 등이 북원 사신을 받아들이는 등 원과의 관계개선에 주력하는 움직임을 보이자 신진사대부들이 이에 제동을 걸고 나선 것이다. 이인임 정권에 대한 신진사대부의 도전은 실패로 끝났다. 그러한 타격에도 불구하고 신진사대부가 정치활동에서 안전히 배제된 것은 아니었다.
위화도 회군은 신진사대부가 마침내 집권세력으로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회군은 이성계를 중심으로 하는 신흥 무장 세력이 주도했지만 여기에는 신진사대부의 정치적 이해관계도 개입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우선 신진사대부의 외교 노선이기도 한 친명노선이 회군의 명분이 되고 있다는점에서 그러하다. 그러므로 위화도 회군은 정치권력의 장악을 목표로 하고 있던 이성계 등 신흥 무장 세력과 현실개혁에 관심을 갖고 있던 신진사대부의 정치적 결합으로 성공 할 수 있었다.
위화도 회군후 집권세력으로 부상한 신진사대부는 권력 개편에 성공한 후 사전개혁과 관제개편 등 개혁정치를 주도하고, 공양왕을 옹립하여 왕조교체의 기반을 조성하고 있었다. 그런데 신진사대부는 이러한 정치과정을 거치면서 점차 내적으로 분화하기 시작하였다. 사전개혁 문제 등을 둘러싸고는 온건한 개량노선을 지지하는 세력과 급진적 개혁을 추구하는 세력으로 왕조교체를 둘러싸고는 왕조를 유지하려는 세력과 왕조교체 세력으로 나누어지고 있다. 사전개혁을 둘러싸고 당시 사대부층은 ‘일전일주론’과 ‘사전혁파론’으로 나누어져 대립하고 있었다. 이색 ·권근 등은 수조권분급제를 유지하는 가운데 전주를 1인으로 확정함으로써 수조권이 중첩되는 데 따르는 폐단만을 바로 잡고자 하는 ‘일전일주론’에 입각하여 사전문제를 해결하자는 입장이었고, 반면, 조준·정도전 등은 사전제 자체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이를 혁파해야한다는 입장이었다. 사전혁파론은 과전법이 성립되는 과정에서 일정하게 절충됨으로써 수조권분급제의 폐기로 기결되지는 못했지만 사전 개혁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급진적인 개혁론이었다.
신진사대부의 내적분화는 공양왕 옹립과정에서 더욱 심화되고 있었다. 이성계·정몽주·정도전·조준등은 다시 ‘우창비왕설’을 제기하면서 공양왕 옹립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반면에 이색 등은 이에 맞서고 있었다. 따라서 공양왕 옹립 후 이성계파는 이색, 권근, 이임등을 숙청하였다. 사전개혁을 둘러싸고 대립하여 왔던 신진사대부 내의 두 세력은 공양왕 옹립과정에서 세력 균형관계가 무너져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급진적 개혁파가 확실한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공양왕 옹립을 지지했던 신진사대부는 왕조교체과정에서 다시 분화하면서 대립하기 시작한다. 공양왕 2년 5월에 발생한 윤이·이초 사건은 무고로 판명되었지만 이성계파는 다시 대간을 동원하여 이색등에 대한 처벌을 주장하고 나섰다. 이 사건을 처리해 나가는 과정에서 이성계파가 왕조교체의 의도를 분명히 드러내게 되자 공양왕은 이를 파악하고 이성계파의 입장과 일정하게 거리를 두고 있었다. 한편 윤이·이초사건은 공양왕 옹립에 참여했던 인물들이 세력집단에서 이탈하여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중심인물은 정몽주였다. 이성계파가 왕조 교체를 가시화 시키자 고려왕조를 유지하려는 세력집단의 중심인물로 정몽주가 활동 한 것이다. 이들은 공양왕의 지원을 받으면서 활동하였으므로 조선건국을 주도하고 있던 급진적 신진사대부는 이처럼 위기상황을 맞고 있었던 것이다. 이성계파는 이러한 정치적 위기를 정몽주 암살이라는 비상수단을 동원하여 타개하였고 곧, 공양왕을 폐위하여 조선건국을 가시화시켰던 것이다.
< 참고자료 >
한국중세사학회, <고려시대사강의>, 도서출판 늘함께, 2001
한국역사연구회, <한국역사입문2>, 풀빛
박영규, <조선왕조실록>, 들녘, 2002
변태섭, <한국사통론>, 삼영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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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2.12
  • 저작시기20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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