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고대 민의 계층구조
본 자료는 4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해당 자료는 4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4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한국 고대 민의 계층구조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서 언 (序 言) - 韓國古代史에서의 身分問題

2.「民」혹은 「百姓」의 階層構成과 隸屬關係
1) 「民」과 「百姓」의 用例 검토
2) 「民」의 階層構造와 隸屬關係

3. 下戶 槪念에 대한 考察
1) 下戶에 대한 諸說
2) 史料 속의 下戶 檢討 - 홍승기의 硏究를 中心으로

4. 豪民 槪念에 대한 考察
1) 豪民 槪念의 把握
2) 邑落社會의 豪民層 成立

5. 결 어 (結 語)

# 참고문헌

본문내용

분해된 것도 주된 원인으로 지목된다. 이러한 계층 분화 과정에서 호민층의 출현이 이루어졌다.
한가지 살펴보고 싶은 것은 이들이 기본적으로 경제적인 면에서 일반민의 신분을 기반으로 상층분화하여 형성되는 과정에서 단순히 부유한 상층민의 성격만 가지고 있었을까의 문제이다. 왜냐하면 豪民은 貴族層으로 편입되어 가는 諸加와 상하로 연결되면서 읍락 내에서는 실질적인 지배를 담당할 수 있는 소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즉, 호민층으로 성립되어간 계층으로 다음의 두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하나는 諸加로 성립되어져 가는 族長 밑의 氏族長 계층을 들 수 있고, 다른 하나는 民에서 사회 경제적으로 성장한 부유한 상층민이 그것이다. 참고적으로 三國志 東夷傳의 부여 관련 기사에 등장하는 호민층의 경제적인 배경을 살펴보자. 부여는 산릉과 넓은 연못이 많아서 동이지역에서는 가장 넓고 평탄한 곳으로 토질은 오곡이 자라기에 적당하다는 기록으로 보아 비옥한 토지를 기반으로 농업생산이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옛 부여의 풍속에 가뭄이나 장마가 계속되어 오곡이 영글지 않으면 그 허물을 왕에게 돌려 왕을 마땅히 바꾸어야 한다거나 죽여야 한다.고 하여 농사의 풍흉이 왕의 교체까지 언급될 정도로 부여는 일찍부터 경제적으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심대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읍락에서 호민층이 성립될 수 있는 경제적 배경은 농업을 주로한 부의 축적으로 생각된다. 이외에 부여의 사회발전 정도로 보아 호민은 수공업이나 상업 등에도 관여하여 부를 축적했던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겠다.
文昌魯, 三國時代 初期의 豪民, 歷史學報125, 1990
정리하자면 豪民은 읍락사회의 공동체적인 질서의 붕괴와 함께 계층분화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경제적으로 부유한 상층민으로 등장하였는데, 小聯盟國 단계를 거쳐 聯盟王權이 형성되어 가는 과정에서 邑落內의 실질적인 지배력을 행사하는 상위 신분 계층으로 성립하게 되었던 것으로 이해해 볼 수 있겠다.
5. 결 어 (結 語)
지금까지 下戶와 豪民을 중심으로 계층이 분화되어 가능 과정에서의 民의 存在樣態를 살펴보았다. 이는 전근대사회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 기본적인 키워드로서신분에 고민과 철저한 파악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의 발로였다.
우선 민과 백성의 용례를 살펴보았으며, 민의 분화형태에 대해 사료를 통해 재구성해보았다. 즉, 양인농민 가운데서 최하의 계급을 형성하는 존재로는 乙弗과 같은 傭人이 있으며, 다음으로坐而哭者와 같은 계급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기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자영농민의 존재를 상정할 수 있는데 특히 陰牟와 같이 상당히 많은 토지를 가지고 있어서 노동력을 사야하는 경우도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크게 보아 당시의 양인농민은 큰 시야로 보아서자영농민(또는 자급농민)과용작농민으로 나누어 본 것이다.
이어서 그들 사이의 예속관계를 2단계로 나누어 보았는데, 백성(自給農民과 상층의 傭作農民)에 대한 경제적인 수취와 力役의 동원은 1차적으로 중간계층이라 할 수 있는 호민을 통해 諸加에게, 다시 2차적으로 諸加를 거쳐 왕에게 전달되었을 것으로 추론해 본 것이 그것이다.
다음으로 3장과 4장에서는 본격적으로 下戶와 豪民에 대한 검토를 해보았다. 하호의 대해서는 그 성격에 대해 노예로 규정한 견해가 나온 이래 비자유민, 집단예속민 등으로 보는 견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장들이 이어져 오고 있으나, 부여고구려삼한의 하호의 성격을 일괄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사료의 부족으로 아직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고 있는 현재까지의 상황을 되짚어 보았으며, 홍승기의 연구를 언급하면서 하호라는 표현이 주로 三國志를 중심으로 관찰되고 있음에 유의하여 民의 존재를 中國人이 관찰할 때 간혹 하호라고도 표현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호민과 관련해서는 문헌 속에서의 호민에 대한 개념 파악과 그 동안의 연구 경향을 검토해 본 후 문창노의 연구를 중심으로 읍락사회에서 차지하고 있는 호민의 성격을 파악하는 과정에서 聯盟王權의 성립을 거론해 보았다. 이를 통해 豪民은 읍락사회의 공동체적인 질서의 붕괴와 함께 계층분화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경제적으로 부유한 상층민으로 등장하였는데, 小聯盟國 단계를 거쳐 聯盟王權이 형성되어 가는 과정에서 邑落內의 실질적인 지배력을 행사하는 상위 신분 계층으로 성립하게 되었던 것으로 이해해 볼 수 있었다.
검토 과정에서 스스로 부족하고 허술한 면을 무수히 확인했지만 民의 존재형태에 대한 최소한의 파악을 목표로 보고서를 작성해 보았다. 누락되었거나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후에 계속적으로 수정을 가할 것을 기약해본다.
# 參 考 文 獻
1. 史 料
三國史記
三國志 魏書 烏丸鮮卑東夷傳
2. 單行本
白南雲, 朝鮮社會經濟史, 改造社, 1933 ; 하일식 역, 이론과 실천, 1994
-----, 朝鮮封建社會經濟史, 改造社, 1937 ; 하일식 역, 이론과 실천, 1994
李淸源, 朝鮮社會史讀本, 1936
全錫淡, 朝鮮經濟史, 1949
김석형, 조선봉건시대 농민의 계급구성, 과학원 출판사, 1957
한국역사연구회, 『한국역사입문』1, 풀빛, 1995
한국고대사학회, 『고구려사 연구의 현황과 과제』, 한국고대사학회 제 70회 정기발표회 기념 학술대회, 2002
3. 論 文
武田幸男, 魏志東夷傳에 나타난 下戶問題, 朝鮮史硏究會論文集3, 1967
김병하, 한국의 노예제사회문제, 한국사시대구분론, 1970
洪承基, 1~3世紀民의 存在形態에 대한 一考察 - 所謂下戶의 實體와 관련하여, 역사학보63, 1974
李址麟, 朝鮮古代社會의 性格, 古代朝鮮의 基本問題, 1974
신동하, 韓國古代國家의 官等制와 身分制, 同大論叢13, 1983
이인재, 신라통일 전후기 조세제도의 변동, 역사와 현실4, 1990
文昌魯, 三國時代 初期의 豪民, 歷史學報125, 1990
이기백, 韓國 傳統社會 農民의 身分과 階級, 韓國史市民講座6, 1990
강봉룡, 삼국시기의 율령과 민의 존재형태, 한국사연구78, 1992
趙法鍾, 韓國古代 奴婢의 發生 및 存在樣態에 對한 考察, 백제문화22, 1992
-----, 한국고대신분제연구, 國史館論叢52, 국사편찬위원회, 1994
  • 가격2,000
  • 페이지수13페이지
  • 등록일2006.05.11
  • 저작시기2006.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48863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