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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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 연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 연구 목차

Ⅰ. 서론

Ⅱ. 기독교의 전파 및 형성

Ⅲ. 기독교 박해의 원인
1. 박해의 원인 사례 1
2. 박해의 원인 사례 2

Ⅳ. 기독교 박해의 실태
1. 제1차 박해기간
2. 제2차 박해기간
3. 제3차 박해기간

Ⅴ.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기독교 공인

Ⅵ.결론

본문내용

는 서부 유럽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고 312년 로마 원로원은 콘스탄티누스를 최고통치자로 영접하였고 그의 승리를 기념하는 개선문을 착공하였다.
이로서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인들의 신을 보호 신으로 공경하기 시작했으며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는 길을 열었다. 밀비오 다리의 승리를 콘스탄티누스는 그의 친구였던 유세비우스에게 들려주자 유세비우스는 황제 사망 후에 “콘스탄틴의 생애”라는 책을 내어 놓았다.
3) 국교의 성립 김성태 저, “세계교회사1” 성바오로출판사, 1990, p222
밀비오 전투 승리 후 콘스탄티누스는 313년 밀라노로 갔다. 거기서 자기의 누이동생 콘스탄시아와 동부지역의 황제 중 한사람인 리치니우스와의 결혼식에 참석하여 두 황제는 이른바 ‘밀라노 칙령’이라는 포고령을 선포하여 동부로마제국의 집정관들에게 제국내의 여러 종교들에게 부여된 기존권을 기독교에게도 승인하고 기독교 신자들에게 관용을 베풀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동부지역의 또 다른 황제인 막시미누스는 기독교 박해자로서 이 포고령을 수행하는데 걸림돌이 되었다. 따라서 리치니우스는 313년 아드리아노폴리스에서 막시미누스와 싸워 승리한 결과 동부지역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으며 6월 니코메니아에서 밀라노 칙령을 시행하라는 포고령을 내렸다.
여기에 황제의 포고령 유세비우스 저, 엄성옥 역, “유세비우스의 교회사” p550
을 부분 부분 옮겨 보고자 한다.
“ 우리는 이미 오래 전부터 종교의 자유를 부인해서 안 되며 각 사람에게 자신의 결정에 따라 거룩한 의무를 수행할 권리를 부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공경하고 예배하는 일에 대한 것을 먼저 제정하기로 결정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기독교인과 모든 백성들에게 자신의 자유 의지에 따라 원하는 신앙 양식을 좇을 것을 허락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건전하고 올바른 의도를 갖고서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의 관습을 지키고 예배를 드리는 자유를 박탈하지 않는다는 우리의 뜻을 명령하는 바이다. ........ 또한 우리는 기독교인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명령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과거에 기독교인들이 모이던 장소들을 다른 사람이나 국가로부터 사 들였다면 아무런 대가나 돈을 받지 말고 조금도 지체 하지 말고 돌려주어야 한다. ......이미 우리가 많은 일속에서 경험했던 하나님의 은총이 항상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이같은 우리의 관용과 명령을 문서로 기록하여 공포하여 모든 사람에게 알리며, 그리하여 이같은 우리의 관용과 자비를 알지 못하는 한 사람도 없게 하라.“
서부로마제국의 유일한 통치자가 된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와 신자들에게 우호적인 정책을 실시하며 자기군대의 군기에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를 뜻하는 \'상징\'을 사용하였다.
그는 재위기간 기독교에 물질적, 법적 특혜를 베풀었는데 313년 그는 로마주교 즉 로마교황에게 라테라노 궁전을 기부하여 후에 이곳에 콘스탄티누스 대성전이 건립되게 하였다. 또한 콘스탄티누스시대에 베드로 대성전, 예루살렘 무덤성당, 베들레헴 예수탄생성당등이 건립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에게는 호의적인 법적 조치를 취하였으며 이교도에게는 조심스럽게 제한함으로서 기독교 발전에 크게 기여 하였다.
324년 동부지역의 황제인 리치니우스가 반기독교정책을 실시하자 콘스탄티누스는 크리소폴리스에서 리치니우스를 격퇴시키고 전 로마제국의 유일한 통치자가 됨에 따라 기독교 역시 로마제국 안에서 보편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제 콘스탄티누스는 그의 사생활에서도 그가 기독교인임을 공언하였고 그의 가족은 모두 신자로서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였으며 337년 콘스탄티누스가 임종직전 세례를 받고 황제복을 입기를 거부하고 영세복인 흰옷을 입은 채 세상을 떠났다. 동방교회는 콘스탄티누스 대제를 “제13의 사도”와 성인으로 추앙하고 있다.
콘스탄티누스의 세 아들도 부친을 따라 기독교 우호정책을 폈으나 콘스탄티누스의 이복형제의 아들 율리아누스시대에는 기독교 신앙의 거부로 주춤했으나 그가 페르시아와의 전투에서 전사하자 테오도시우스 1세가 황제가 되면서 다시 회복되었으며 이때 ‘니케아 공의회 신조가 담긴 정통교리’가 확인되었고 정교일치 정책으로 명실 공히 기독교가 국교로 자리 잡게 되었다.
Ⅵ. 결론
1907년의 부흥을 2007년에도 다시 일으켜 보자는 신념 아래 많은 성도들과 교계지도자들의 움직임 속에서 왜 우리는 로마의 핍박 속에서 성장한 초대 교회와 같이, 1907년의 평양 대 부흥과 같은 ‘부흥이 쉽게 일어나지 않을까? 아니 왜 그런 부흥은 다시없을 것’이라고 단정을 지을까?
물론 여기서 답을 제시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초대 교회와 같이, 평양과 같이 성도들의 마음에 복음에 대한 열정이 식어 있지는 않을까? 우려하는 마음에서 이러한 질문을 던져 보았다.
부활에 대한 확신과 순교의 열망,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순수한 믿음이 있었기에 핍박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먼저 순교하려고 재판장 앞으로 달려 갈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기록을 보면서, 참고 서적을 읽으면서 ‘사람이 이렇게도 할 수 있는가?’ 싶은 마음도 들었으며 또한 이러한 고문과 핍박과 박해를 받으면서도 “그분을 통한 구원에 대한 믿음, 순교의 면류관에 대한 소망”으로 굳건히 이겨낸 선진들의 신앙에 대해 단순한 박수나 찬사로는 도저히 용납될 것 같지가 않다.
다만 이러한 믿음에 보답하는 길은 그들의 믿음과 순교, 희생정신을 본받아서 나 또한 이러한 믿음을 가지며 복음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어떠한 시련과 어려움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아니 죽음도 불사할 수 있는 믿음으로 성도들과 후배들에게 전하며 보여주는 것이 그분들의 희생에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참고문헌
이성호 편저, 『기독교 박해사』, 혜문사, 1962.
김성태 저,『세계교회사Ⅰ』,성바오로출판사, 1990.
F.F. 브루스 저, 서영일역, 『초대교회역사』기독교문서선교회, 1994.
엄성옥 역, 『유세비우스의 교회사』, 도서출판 은성, 1995.
심창섭,『기독교 교회사』,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1998.
김영재 저, 『기독교 교회사』이레서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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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5.30
  • 저작시기20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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