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론]근대시론 형성 및 자유시론 - 1910년대부터 20년대까지의 시론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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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현대시론]근대시론 형성 및 자유시론 - 1910년대부터 20년대까지의 시론史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서론

2. 근대시와 시론의 형성
2.1. 한국 근대시의 시작
2.2. 근대시론의 형성

3. 상징주의 시론

4. 자유시론의 분류
4.1. 자유시론의 형성
4.1.1. 김억
4.1.2. 황석우
4.2. 자유시론의 정착
4.2.1. 양주동
4.2.2. 주요한

5. 결론

본문내용

많았고, 그렇기 때문에 조선 문학상으로는 독창적이 아니라고 할 수 있으나 아무 본뜰 데도 없는 당시에 어린 필자의 경우로는 그 이상을 요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 형식도 역시 아주 격을 깨뜨린 자유시의 형식이었습니다. 자유시라는 형식으로 말하면 당시 주로 불란서 상징파의 주장으로 고래로 내려오던 각법과 라임을 폐하고 각자의 자연스러운 리듬에 맞추어 쓰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조선말로 시험할 때에 자유시의 형식을 취하게 된 것은 그 시대의 영향도 있었거니와 조선말 원래의 성질상 그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과거의 조선말 시가의 형식으로 말하자면 시조이든지 민요이든지 운(韻)다는 법은 없었고, 다만 글자수효, 다시 말하면 씰라블의 수효가 일정한 규율을 따를 뿐이었습니다. 민요의 형식 중에는 88조가 가장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형식이 심히 단조한 것은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어던이는 일본시가의 형식인 75조 혹은 57조를 시험해 본 것도 있습니다만은 그 결과 다 새로운 시를 지으려는 데에 합당한 재료가 못 되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발표된 몇 편의 시험적 작품이 동기가 되어 그 뒤를 이어 혹은 그와 동시에 각처에서 비슷한 형식으로 작품이 발표되었습니다.
이상의 고백에서 눈여겨 볼 부분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그가 시도한 자유시가 프랑스 상징주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 다른 하나는 자유시의 형식이 당시의 시대상황과 관련되기도 하지만, 조선말 원래의 성질과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주요한은 자유시란 율격과 각운의 법칙을 폐기하고 시인의 자연스러운 리듬에 맞추어 창작되는 시로 정의하였다. 조선말의 경우, 그것은 음수율의 폐기를 뜻하고 있다.
셋째, 주요한은 신시운동이 나가야 할 두 방향에 대해 제시하였다. 하나는 신시의 내용과의 관계이며, 다른 하나는 신시와 우리말과의 관계이다. 전자가 내용의 문제라면, 후자는 형식의 문제에 해당된다. 주요한은 먼저 시에 있어서 내용과 형식은 구분되기 어렵고, 형식이 중요하다는 견해를 밝혔다. 그러나 형식보다 중요한 것이 내용이라고 주장하였다. 프랑스 자유시의 특성은 전통적 형식을 파괴한 점보다는 그 내용의 영원성에 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내용이 앞으로 지향하는 바에 관심이 두어야 하는 것이다. 주요한은 그것을 “민족정서와 사상을 바로 해석하고 표현하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덧붙여 주요한은 내용을 중시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기준을 충족시켜야 한다고 보았는데, 하나는 개성에 충실할 것, 다른 하나는 조선 사람의 개성에 충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이 주요한이 강조하는 우리 신시의 방향은 한마디로 민족시의 개념, 혹은 민중시의 개념으로 규정하였다. 그것은 민요를 토대로 민족혼, 곧 민족의 정서와 사상을 개성적으로 표현하는 시이다. 그렇다고 해서 배타적인 국수주의는 지양해야 할 것이며, 이런 점 때문에 주요한은 세계문학과의 관계 속에서 민족시와 민족문학의 개념을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위의 책, pp. 45~47
앞의 내용을 총체적으로 짚어 본다면 주요한은 자유시의 앞길에는 두 가지의 문제가 있다고 언급하였다. 하나는 민족적 정조와 사상을 바로 해석하고 표현하는 것, 또 다른 하나는 조선말의 미와 힘을 새로 찾아내어 지어내는 것으로 보았다. 때문에 주요한은 불란서 상징주의를 언급하면서 그동안 소홀했던 내용의 문제에 대해 지적하였다. 그는 프랑스의 자유시가 장래 시에 상당한 지위를 차지한다고 하면 이는 형식의 파괴성보다는 그 내용의 영원성에 의한 것이라고 평가하며 내용의 소홀함을 경계했다. 그리하여 그는 신시의 작가들이 새로운 정신과 새로운 미를 발견하게 된다면 우리 신시운동은 성공한다는 주장을 펼치면서, 상징주의 수용상에서 소홀했던 점에 대해 지적하여 주의를 환기시켰다. 또한 조선말의 진정한 미에 대한 견해를 밝히는데도 외국어의 직역은 결코 조선말이 되지 않는다는 점, 고어의 부활이 결코 조선말이 아니라는 점 등에 근거하여 당대 상징주의 이입을 반성하면서, 조선의 신시운동이 성공하려면 반드시 민요를 기초로 삼고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5. 결론
우리의 근대시론은 이전까지 과거를 답습해왔던 관례를 깨고 새로운 형식으로 나아가려는 문인들의 몸부림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중 프랑스 상징주의는 가장 폭넓게 받아들여진 갈래로, 근대시, 특히 자유시의 형성에 있어서 빠뜨릴 수 없는 이론이 되었다. 백대진, 김억, 황석우 등의 인물들이 나서서 상징주의 시론을 번역하고 몇몇은 상징주의에 입각한 창작시를 발표함으로 인해 자유시형과 그에 따른 견해와 이론들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자유시형은 규범적인 작시법이나 정형적 시형이 선사하는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스러운 리듬에 의해 창조된 시형으로, 그 자유로움의 경계가 명확치 않아 김억, 주요한 등이 음률과 억양을 언급하면서 여러 차례 논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자유시론은 발전할 수 있었다.
앞에서 알 수 있다시피, 근대시론은 과거를 밑거름삼아 짜여진 틀을 벗어던지고 새로운 것을 찾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러나 기본의 틀을 완전히 배제한 것은 아니었다. 새로운 것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그를 뒷받침할 수 있는 토양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경이 ‘현대 자유시가 산문을 적당히 끊어 읽는 것뿐’이라는 오명을 쓰게 만들었다 하더라도, 그 도전정신과 창조적인 생각에 대해서는 높이 사야 마땅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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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문단」(합본), 한국학자요원, 1985
「한국근대시문학사연구」, 국학자료원,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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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8.29
  • 저작시기200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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