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불교의전래와공인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삼국불교의전래와공인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삼국시대

2. 각 나라별 불교공인시기 및 내용

3. 대표승려

본문내용

리로 취임하지 않으면
목을 베겠다고 협박했다.
이에 자장의 " 나는 차라리 계 (戒)를 지키고 하루를 살지언정,
파계 (破戒) 하고 백년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吾寧一日持戒而死 不願百年破戒而生) " 라는 단호한 답변은
고승으로서의 면모를 확인시켜 주고 있다.
636년 당나라로 유학을 떠난 자장율사는 중국 계율종의 본산인 종남산(終南山)과 문수 보살의 주처인
오대산(五臺山)에 머물렀다. 여기서 문수보살의 현신을 만나 석가모니가 입던가사 한벌과 바리때 하나,
부처님의 정수리 뼈와 치아사리 등을 받은 자장율사는 643년선덕여왕의 요청으로 귀국하였다.
귀국후 스님으로서는 최고 자리인 대국통(大國統)에 임명된 자장율사는 전국의 승려들에게 계를 내려
규율을 단속하고, 사신들을 파견하여 지방 사찰을 순회 감독하게 하는 등 대대적인 불교정비에 나섰다.
아울러 불교를 통치이념으로 국력의 신장과 국론의 통일을 꾀하고, 신라 불국토사상을 전개해 불교의
토착화에 공헌하였다.
이러한 자장 율사의 사상적 구심점은 바로 삼국 통일의 염원이 담긴 황룡사 9층 목탑의 건립과
계율근본도량인 통도사금강계단의 건립에서 보다 구체화 되었다. 즉, 중국에서 모셔온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위의 두곳에 봉안함으로써 신라사회와 모든 불교 세력을 규합할 수 있었다.
겸익
백제 승려로 백제 律宗의 시조이다.
526~530 인도 상가나사에 가서 律을 연구하였다.
백제에서 불교가 가장 번창한 것은 사비시대인 26대 성왕(523∼553)때로서 아직 서울을 사비성으로 이전하기 전인 웅진시대 성왕 4년(526) 고승 겸익을 불교의 기원지인 인도에까지 파견하여 5년 동안 직접 범어를 배우고 율종을 전래하도록 한 것 등은 불교의 전래도 서역에서 직접 받아들인 백제의 국제화된 사고에서 고구려나 신라와 다른 차원이라고 할 수 있다.
겸익은 범승(梵僧) 배달다(倍達多) 삼장과 함께 범서로된 불교경전과「오분율」같은 불서를 가지고 귀국하여 율종을 전파하는 한편, 흥륜사에서 국내의 명승 28명과 함께 율부 72권을 번역하여 펴내도록 하였다. 담욱(曇旭)과 혜인(惠人)이 이에 "율소(律疏)" 36권을 지었으며, 왕이 서문하여 자연 율종(律宗)의 성행을 보게 되었고, 이로써 겸익(謙益)은 백제 율종의 시조가 되어다.
이에 의하여 백제의 율종은 확고한 기틀을 마련하게 됨에 따라 불교의 발전을 거듭하게 되며 훗날 일본인 선신니에게 계를 주게 된다.
관륵
삼론학(三論學)의 대가(大家)로, 602년(무왕 3) 일본에 건너가 겐코사[元興寺]에 머물면서 역본(曆本)·천문(天文)·지리(地理)·둔갑술(遁甲術) 등에 관한 문헌을 전하고, 제자를 길러 불교 전파에 크게 공헌하였다.
625년(무왕 26) 일본에서 어떤 승려가 자기의 조부(祖父)를 도끼로 살해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로 연유해 불교에 대한 일본왕의 박해가 심해지자 이를 무마하고 승정(僧正)이 되어, 전국의 승려를 단속하면서 질서 확립에 노력하였다. 이것이 일본 승강(僧綱)의 효시가 되었다.
혜랑
본래 고구려의 승려였는데 고구려의 국력을 정탐하러 왔던 신라의 이찬(伊飡) 거칠부(居柒夫)를 재빨리 귀국하게 함으로써 체포를 면하게 하였다. 훗날 혜량의 예언대로 거칠부가 대아찬(大阿飡)이 되었는데, 551년(진흥왕 12) 나당(羅唐)연합군이 고구려를 칠 때 거칠부를 따라 신라에 귀화, 진흥왕의 명으로 승통(僧統)이 되어 처음으로 백좌강회(百座講會)·팔관회(八關會)를 주재하였다.
담시
혜시(惠始)라고도 한다. 출가한 뒤부터 기적에 가까운 신기한 행적이 많았고 발바닥이 얼굴보다 희었으며, 진흙을 밟아도 얼룩이 묻지 않아서 백족화상(白足和尙)이라고 불렸다. 전진(前秦)의 승려 순도(順道)가 불교를 처음으로 전한 뒤, 동진의 효무제(孝武帝) 태원(太元) 연간(376~396)에 경(經)과 율(律) 수십 부를 가지고 고구려 요동(遼東)에 와서 불법을 펴 삼승(三乘)의 가르침으로 삼귀오계(三歸五戒)의 법을 세워 교화하였다고 전한다.
그는 405년(광개토대왕 15) 무렵 귀국하였는데, 418년 하(夏)나라 세조(世祖)가 관중지방을 점령하고 살육과 약탈을 자행할 때 불가사의한 행적으로 자국의 백성을 보호하였다. 또한 북위(北魏)의 태무제(太武帝)에게도 신비한 이적을 행하여 불법을 크게 펼쳤다고 한다. 뒤에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 두타밀행(頭陀密行)을 수도하였고, 다시 관중으로 돌아와 불교의 부흥에 힘썼다.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에 따르면 그의 행적이 동쪽에 나타나고 서쪽에서 자취를 감추며, 중앙에 나타나고 주변에서 감쪽같이 사라져 사람들이 알 수 없게 하였다고 한다. 아도(阿道), 묵호자(墨胡子), 마라난타(摩羅難陀)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설도 있다.
승랑
고구려 후기의 승려로 요동(遼東) 출신. 중국 구법승,삼론학(三論學)을 확립시켰다.
장수왕(413-491) 후기 중국으로 가서 승조(僧肇) 계통의 삼론학을 연구하여 학문적인 체계를 완성하였다. 처음 북조(北朝)로 가서 공부한 뒤, 종산(鍾山) 초당사(草堂寺)에 가 있던
중 그때 학계에서 은퇴하여 그곳에 머물러 있던 주옹에게 삼론학을 가르쳤으며, 주옹은 이에따라 "삼론종(三論宗)"을 지었다.
그후 섭산(攝山) 서하사(棲霞寺)에 머물렀는데, 이때 그의 명성을 들은 梁나라 무제(武帝)가 512년(문자왕21년) 우수한 학승 10명을 뽑아 그에게 수학하게 하였다.
그때까지 중국에서는 삼론과 성실론(成實論)이 함께 연구되어 학문적인 분류가 없었던 것을 그가 비로소 체계화하여 삼론학을 확립시킨 것이다.(영고승전)
승랑대사가 전개한 삼종중도는 세제중도(世諦中道)·진제중도(眞諦中道)·이제합명중도(二諦合明中道)의 세가지 진리성으로, 세간과 출세간의 진리를 뜻하는 진속(眞俗) 이제(二諦)의 개념에서 ‘중도’라는 불교 근본진리를 새롭게 변증해 낸 것. 승랑은 ‘중생의 인연법은 공이고, 가명(假名)이며 중도의(中道義)다’고 한 삼시게(三是偈)에 바탕, 삼종중도론을 전개했다. 승랑의 삼종중도론은 ‘반야’ ‘공성(空性)’ 파악 으로 흐르는 중국불교계에 ‘중도’라는 불교 정법 진리를 알려 ‘자행이타(自行利他)의 대승이념을 철저히 실현하게 해 주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
  • 가격1,000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06.12.07
  • 저작시기2006.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65330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