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와 문화- 삼국통일의 원동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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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의 역사와 문화- 삼국통일의 원동력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서론 : 신라의 삼국통일을 둘러싼 논쟁

본론 : 삼국통일의 원동력 및 전개과정
1. 여제동맹에 대한 신라의 외교적 대응
2. 신라의 국력 급격히 신장, 나당연합
3. 수, 당과의 오랜 싸움 - 고구려 국력 소모
4. 연개소문이 죽자 고구려 지배층 내부분열
5. 당의 야욕을 미리 간파한 신라의 준비
6. 신라의 고구려 부흥 세력 지원

결론: 삼국통일의 의의

본문내용

고구려 유민에 대한 신라의 포섭책에 점점 초조해져서, 신라를 무너뜨리기 위하여 모든 수단을 동원하였다. 신라의 귀족들을 개별적으로 회유하여 분열을 조장하기도 하고 대규모 무력 공격을 감행하기도 하였다, 당은 대항하는 신라의 문무왕 대신에, 당에 머물러 있던 문무왕의 아우 김인문을 신라왕으로 삼아 귀국시켜 신라의 정치권을 분열시키려 하였다. 뿐만 아니라 유인궤 등으로 하여금 대군을 이끌고 신라를 공격하게 하여 하였다. 이러한 당의 계획은 결국 중도에 포기되고 말았지만, 이는 신라에게 극도의 귀기 의식을 갖게 한 커다란 사건이었다. 이에 따라 신라는 침략자에 대한 경계의 끈을 더욱 조이고 사회 체제를 일신해 갔다. 불만을 품고 있는 구귀족들을 처단하고 하급 관리 들을 우대하였으며 지방민들을 국가의 둔대 조직에 편하였다. 신라인들의 사기는 충천하였으며, 육전이든 해전이든 당과 마주치는 곳에서는 언제나 승리를 거두었다. 이 중 신라에 특히 결정적인 승리를 안겨 준 것은 매소성(양주 부근)과 기벌포 (긍강 하구)에서 벌어진 전투였다. 675년에 벌어진 매소성 전투에서 신라군은 당의 이근행이 이끄는 20만 대군에게 막대한 타격을 입히고 전마 3만여필을 획득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어 676년에는 설인귀가 이끄는 당의 해군을 기벌포에서 대파하였다. 이제 당은 더 이상 싸울 의욕을 잃고, 한반도 내에 주둔시켰던 군대를 서서히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평양에 설치된 안동 도호부도 결국은 요동성으로 옮겨 갔다. 그 결과 신라는 대체로 대동강과 원산만 이남의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것은 그 이전에 김춘추가 당 태종과 맺은 동맹의 조건과 일치하는 것으로서, 신라가 660년부터 16년간에 걸쳐 백제, 고구려, 그리고 당과 싸우면서 달성한 삼국 통일의 결실이었다. 역사문제연구소,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의 역사1』, (웅진 지식하우스, 2005), p. 180-182.
삼국통일의 의의
이러한 신라의 삼국통일은 외세인 당과 연합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옛 고구려의 넓은 땅을 포기하였다는 점에서는 아쉽다. 그러나 당과의 전쟁을 통하여 당의 야욕을 꺾었다는 점에서는 높이 평가하고 싶다. 또한 삼국통일은 삼국의 문화를 수렴하여 보다 차원 높은 민족문화로 발전시킬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 역사문제연구소,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의 역사1』, 서울: 웅진 지식하우스,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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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11.01
  • 저작시기2006.9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69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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