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와 발해의 유적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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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에 대해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고구려와 발해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2. 홀본지역의 고구려 유적 : 홀본성, 비류수, 다물도
<고구려의 성>

3. 고구려의 피라미드 장군무덤(장군묘)과 태왕릉, 벽화

4. 고구려는 문화민족이었다.-고구려 벽화

5. 광개토대왕 비의 비밀

6. 424년간의 고구려 수도, 국내성과 환도산성, 국동대혈

본문내용

다.
그러나, 능비의 연구는 문헌사료의 부족이라는 한국고대사가 갖는 일반적 한계와 고구려사연구의 현실적 한계 및 삼국 학계의 입장의 차이에 의하여 방대한 연구결과에도 불구하고 논의는 결론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신묘년기사의 판독과 해석에서 보는 바와 같이 변조된 비문을 토대로 한 초기 일본관학에 의해 능비가 '임나일본부'의 주요 근거로 제시된 이래 일본학계는 당대 동아시아의 국제관계에서 왜를 주도적으로 보고자 한 까닭에 비문연구의 방법론상의 진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답보상태에 머무르고 있는 형편이다. 한국학계의 경우에도 비문의 구조나 용사의 면밀한 검토 없이 왜의 등장에 대한 공방에 경도된 나머지, 주객이 전도되어 일방적 해석이나 결자의 복원도 단순한 방법에 의거 고대 한일관계의 입장을 합리화하는데 지나치게 노력을 낭비해 온 느낌이다.
이는 일차적으로 능비연구의 기본적인 자료가 되는 원석탁본을 비롯한 연구자료의 부족에 기인하는 것이나 다른 한편으로는 입장의 차이에 의하여 객관적인 자세를 지키지 못한 데에도 원인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같이 비문을 통한 고대 한일관계사연구는 답보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나, 최근 한국학계의 {일본서기}를 비롯한 고고학적 자료를 활용한 '임나일본부'를 비롯한 고대 한일관계사 연구는 하나의 진전이라고 할 것이다.
정복기사의 연구에 있어서도 그간의 연구는 주로 정복지역의 비정에 매어 있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능비가 원래 나타내고자 하였던 고구려의 조공지배라는 자존적 대외의식을 배경으로한 정복전의 성격에 대한 구조적 이해가 부족하였다. 그 결과 오히려 정복대상이나 위치비정에 혼선이 오게 되었다. 특히 광개토경의 의미를 단순히 영토확장으로 이해하였던 까닭에 남진의 대상을 북방에서 구하고자 한 오류가 생기게 되었을 뿐 아니라 역설적으로 북방진출의 범위도 이미 고구려의 구토가 된 지역에서 구하는등 축소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한편, 신묘년기사를 비롯한 광개토왕릉비의 연구는 고구려사를 중심으로 한 한국고대사 자체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본학계의 한국사 왜곡에 대한 체질 비판에 까지 연결되는 문제이다. 다시 말하면, 비문의 올바른 판독과 해석은 곧 왜곡된 한국고대사의 재구를 의미하는 것이라 하여도 좋을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의 능비연구가 왜의 등장에 대한 논쟁에서 벗어나, 고구려사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고대사의 발전과정의 해명이라는 능비연구 본류에 도달하기 위하여 보다 객관적인 입장에서의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연구가 요망된다고 할것이다.
광개토대왕은 위대한 정복군주인 동시에 유능한 통치자였다. 광개토대왕대 고구려의 정복전쟁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실질적인 농경지의 확보와 민호의 획득을 통한 국력배양에 있었음은 물론이지만 전제왕권의 자존적 대외의식을 기반으로 하여 인국에 대한 정토를 합리화하는 동시에 주 정복대상에 대하여는 그러한 복속관계를 구체화하고자 하였던 점에 있다고 하겠다.
주목되는 것은 고구려에 있어 주 정복대상은 백제와 신라 및 동부여였으며, 왜와 비려등은 부수적인 대상으로 단지 토벌의 대상일 뿐이었다는 점이다. 이는 고구려에 있어 백제와 신라 및 동부여가 왜, 비려와는 성격이 다른 동일 세력권 내의 민족집단으로 인식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광개토대왕의 남진 정책은 민족사의 발전과정에서 최초의 통일의지의 표현이라 하여도 좋을 것이다.
민족의 영광을 위해 점철하였던 광개토대왕의 생애가 어제의 것이 아니라 오늘의 것으로 항상 새롭게 재조명되어야 한다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제는 잃어버린 만주의 옛 강토에 우뚝서 있는 광개토대왕'는 남북분단이란 현실을 극복하고 민족의 통일이란 민족사적 과제를 안고 있는 오늘의 우리에게 이러한 사실을 웅변으로 말하여 주고 있다
6. 424년간의 고구려 수도, 국내성과 환도산성, 국동대혈
※국내성과 환도산성
정확한 의미의 국내성(지금 중국식 지명은 집안임)은 사방 7백여m에 총 둘레가 2,700m에 이르는 사다리꼴 모양의 왕성이다. 그러나 왕성의 개념보다 넓게 보아 고구려의 수도로서 볼 때는 동서 10㎞, 남북 5㎞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말한다. 또한 북방 2.5㎞ 위치에는 외곽 군사방어용 목적으로 지은 환도산성이 있다. 승리한 고구려군이 입성하는 길도 이곳을 지났고 적의 침공 등 유사시에도 이곳으로 옮겨 적과 싸웠다. 그리고 국내성 남쪽에는 동서로 흐르는 압록강이 있다. 이처럼 북쪽으로는 험한 산이 있어 북풍을 막아 주고 남쪽으로는 압록강이 있어 천혜의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 더욱이 북방이지만 연평균 섭씨 6.5도의 살기좋은 기후와 철·금 등 광산자원, 벼·콩·인삼 등 농산자원, 어족이 풍부하여 산물이 많이 나는 곳이다. 원래 고구려의 수도는 홀본이였으나 해발 820m에 있는 험한 산성이라 방어에는 몰라도 대국의 수도로는 모자람이 많자 유리왕 시대였던 AD 3년에 설지(薛支) 등의 뜻에 따라 국내성으로 옮긴 것이다. 이후로 427년 장수왕이 평양으로 서울을 옮기기까지 무려 424년간 고구려의 수도였다. 여기에는 아시아의 제국 고구려의 서울답게 광개토대제비·궁성터·성곽 등 다른 숱한 문화재는 차치하고 고분군 하나만 하더라도 환도산성 부근에 4천 7백여 기를 비롯하여 국내성 지역 전체에 1만 2천여 기가 있다. 왕족·귀족 등의 무덤이 망라되다시피 모여 있는데, 크기는 다양하여 작은 고분에서 직경이 60m가 넘는 거대 고분도 적지 않다. 그리고 고분 밀집 지역도 70여 곳이 넘는다. 특히 1만 2천여기의 고분 중에 벽화가 확인된 곳은 무용총, 각저총, 장군총, 모두루총, 삼실총, 사신총, 오회분 4호묘, 오회분 5호묘, 장천 1호분 등 20여기(평양지역과 합치면 80여기가 남아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가 있다. 벽화에는 고구려인과 고구려의 온갖 모습을 볼 수 있어 실록이나 사진과 같은 역사적 증거로서 값어치있다.
※국동대혈
-고구려 시대 제천의식의 하나인 동맹이 열려된 곳으로서 우리 나라의 충만한 기가 많이 모이는 사람의 혈과 같은 곳이다. 이 곳에서는 자신이 직접적으로 기가 충만해지는 것을 느낄 수도 있는 장소 중에 하나이다. 이와 같은 곳이 북한측에도 한 곳이 있습니다.

키워드

고구려,   발해,   국내성,   광개토,   장군총,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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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2페이지
  • 등록일2004.04.13
  • 저작시기2004.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46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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