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왕국 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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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의 남편이 대신하게 되어 있었다. 당시 왕실은 왕자가 없는 것은 물론 성골 신분을 가진 사위조차 얻을 수 없게 되어 왕계의 단절을 염려할 만한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우리 역사상 최초의 여왕인 신라 제 27대 선덕여왕이 즉위하였다. 전덕여왕 3년 정월에는 연호를 고쳐 인평(仁平)이라 하였다. 여왕을 후원하던 사람 중 가장 두드러진 인물로는 진지왕의 아들로서 진평왕과 사촌이 되는 그녀의 당숙 용춘을 들 수 있다. 또한 승려들도 선덕여왕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성골 왕실이 신라에 불교를 열고 널리 전파하는 데 절대적으로 공헌한 사실은 명약관화했으므로 승려들은 백고좌라는 법회를 얼고 인왕경을 독경하면서 이 왕실의 번영과 안녕을 빌었다. 한편, 백제의 위협과 침략은 여왕의 재위 시에도 계속외어서 신라의 걱정은 실로 심각한 수준에 달해 있었다. 더구나 여왕이 통치하는 까닭에 백제가 얕보고 침략을 그치지 않는다는 생각이 전사회적으로 널리 퍼져 있었고 여왕은 이로 인해 크게 스트레스를 받았다. 선덕여왕 16년은 왕의 재위 마지막 해인데 바로 이 해 정월 초에 상대등인 비담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의 명분은 ‘여왕은 잘 다스릴 수 없다’는 것으로 그들이 종래 가지고 있던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선덕여왕이 누군가에 의해 살해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는 없으나 당시 측근 신하들의 충성심으로 보아 그 같은 일은 없었을 것 같다. 김유신이 분전하여 반란군을 토벌하고 왕실을 지켜내 다시 선덕여왕의 사촌여동생인 승만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으니l 아기 진덕여왕이다. 성골 남자가 없는 상황에서 어쩌면 남아 있는 유일한 성골이었을 승만이 왕위에 오른 것이다.
진덕여왕이 세상을 떠나고 화백회의의 결의에 의해 용춘의 아들 김춘추가 대망의 왕위에 오르게 되었으니 이가 태종무열왕이다. 이로써 성골 왕실은 끝나고 진골 왕실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도니 무열왕계는 혜공왕이 죽임을 당해 왕위를 내놓기까지 127년간 신라의 왕실로 존재하였다. 무열왕을 이은 문무왕은 한편으로 백제의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당나라와 신경전을 벌이면서도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일단 당과 연합하는 정치ㆍ군사적인 안목을 발휘하여 영원한 대국이었던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그 뒤 그는 고구려계와 백제계 주민까지도 포섭하여 결국 당나라의 군대를 매초성 전투에서 대파하고 이어 평양에 설치된 당의 안동도호부를 몰아내어 미흡하지만 대동강 이남을 통일하는 대업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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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12.04
  • 저작시기2006.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80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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