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반민특위][의열투쟁][친일파 처단 활동]친일파의 활동과 해방후 진로 및 반민특위와 의열투쟁의 친일파 처단 활동 분석(친일파의 종류, 반민특위의 활동, 이완용과 송병준, 의열투쟁의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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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반민특위][의열투쟁][친일파 처단 활동]친일파의 활동과 해방후 진로 및 반민특위와 의열투쟁의 친일파 처단 활동 분석(친일파의 종류, 반민특위의 활동, 이완용과 송병준, 의열투쟁의 전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일본의 현재와 신대동아공영론

Ⅲ. 친일파의 종류

Ⅳ. 반민특위의 활동
1. 검거 1호 박흥식
2. 33인 중의 최린
3. 사형구형 1호 김태석
4. 사형선고 1호 김덕기

Ⅴ. 친일파의 해방 이후의 진로
1. 해방 직후의 친일파 처단 공방
2. 제1 공화국과 친일세력
3. 독립운동가로 둔갑한 친일파

Ⅵ. 친일파 이완용과 송병준

Ⅶ. 이토 암살과 한일합병

Ⅷ. 친일파 처단과 의열투쟁의 전개
1. 전반기(1919~1925)
2. 후반기(1926~1935)

Ⅸ. 결론

본문내용

의 의열투쟁 단체인 한인애국단이 알려지게 되었다. 즉 임정은 1930년대 초반 일제의 만주 및 상해 침공으로 인해 독립운동의 기지를 상실할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러한 위기에서 임정은 독립운동 기지를 사수하고 중국내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하기 위해 의열투쟁이라는 방략을 통해 대내외에 임정의 존재와 독립운동의 의지를 알릴 수 있었다. 그 가운데 이봉창?윤봉길 의거는 임정이 중국 국민당정부로부터 군사적?재정적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하겠다. 요컨대 임정은 이봉창?윤봉길 등의 의열투쟁을 통해 중국관내에서 한중합작의 항일전선을 구축하는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독립운동을 지속할 수 있는 기반을 확실히 마련할 수 있었다.
한편 임정의 우익진영은 자파세력의 단합과 임정에 대한 지지?옹호를 위하여 1930년 1월 민족주의자들만에 의하여 상해에서 韓國獨立黨을 결성하였다. 한국독립당 또한 중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활성화하기 위해 1932년 4월 일본관동군 사령관 혼조 시게루(本庄繁) 대장 및 만철총재 우치다(內田康哉) 폭살계획, 1932년 3월 국내잠입 및 朝鮮總督 처단계획 등에 간접적으로 관여하였다. 특히 ‘上海神社擲彈義擧’를 거행하게 하였다. 즉 1934년 3월 3일 상해신사에서 이른바 상해사변 전몰장병 초혼제가 거행되었는데, 여기에 有吉公使, 今村 第三艦隊司令長官, 鈴木 陸軍武官, 安井 居留民會行政委員長 등 상해의 일본인 유력자들이 대거 참석하였다. 이 행사는 오전 10시에 시작되어 약 50분 동안 거행되었는데 행사가 끝날 무렵 한국독립당에서 파견한 강병학이 식장 중앙에 회중전등형 폭탄을 투척하였다. 그러나 폭탄이 불발되어 터지지 않았다.
윤봉길 투탄사건으로 상해를 떠난 임정의 요인들은 항주?남경?진강 등지로 전전하게 되었다. 그러던 사이 상해에 있던 이유필?이수봉?김석 등이 검거되는 등 임정의 의열투쟁이 쇠퇴되어 갔다. 이렇게 되자 임정의 직속단체인 병인의용대에서도 1933년 6월 대헌을 개정하였는데, “본대는 倭敵의 모든 시설을 파괴하며, 국내외의 反革命分子를 肅淸하며 民族的 大團結에 노력하여 한국의 독립을 완성하기로 목적한 비밀결사다”라고 하여 보다 적극적으로 대일투쟁을 전개할 것을 명시하였다. 이는 1930년대 초반 한인애국단과의 경쟁관계와 사회주의 세력과의 대결구도하에서 의열투쟁을 적극적으로 전개할 필요성이 고양되었기 때문이다.
윤봉길 의거 이후 상해를 떠난 임정의 요인들은 항주?진강?남경?가흥으로 분산되면서 일제에 의해 대거 검거되었다. 그 이유는 우선 임정이 독립운동의 중심세력으로 다시 부상하면서 일제가 더욱 밀정들을 활용하여 임정요원들을 회유?검거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 관내에서 의열활동으로 주목을 받던 南華韓人靑年聯盟과 임정의 김구계는 자연스럽게 연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天津 日本領事官邸 爆破 및 육삼정 사건을 일으켜 대외적으로 알려진 남화한인청년연맹의 대표격인 鄭華岩과 김구계의 安恭根이 연계투쟁을 전개하게 되었다. 당시 임정은 중국 국민당의 지원으로 돈은 있었지만 일을 해낼만한 사람이 없었고, 남화한인청년연맹은 사람은 있었으나 일을 치를 만한 돈이 없었다. 그래서 임정의 재력과 남화한인청년연맹의 인력이 합작을 하게 된 것이다. 이후 임정과 무정부주의계는 자주 연계투쟁을 벌였는데, 친일파로서 지목되어 오던 옥관빈?석현구?유인발?옥성빈?이용로 등을 처단하고자 하였다.
1933년 1월 8일 三德洋行의 주인 玉觀彬을 살해하였다. 옥관빈은 상해에서 상당한 재산을 축재하였으나 독립운동에 자금을 제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일본군대를 위해 2만원을 제공하는 등 친일적 태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임정의 김구?안공근과 남화한인연맹의 정화암 3인만 알고 다른 사람에게는 알리지 않기로 하였으며, 옥관빈의 제거는 흑색공포단원 楊汝舟(본명 吳冕稙)에 의해 처단되었다. 정화암은 친일파 제거를 위한 조직으로 鋤奸團을 만들고 1933년 경부터 주로 민족배반자 및 일제의 밀정을 살해하였다. 그러나 서간단은 옥관빈 처단 후 해체되고 말았는데, 그 이유는 김구와 정화암이 분열되고, 오면직이 한인애국단으로 가게되었기 때문이다.
그후 1933년 5월에는 吳冕稙?嚴亨淳?朱烈(金聖壽)?안공근이 일본 밀정 李鍾洪을 교살하였고, 1933년 8월 17일 李殷豪?李雲煥 등이 친일파 石鉉九를 암살하려 하였으나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또한 상해 한인친우회 위원장인 柳寅發을 1933년 8월 31일 임정의 송병조 및 박창세 등이 金水山(金益星)으로 하여금 처단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해 12월 18일 프랑스 공부국 형사 玉成彬의 암살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 또한 김구의 사주에 의한 것이라고 파악된다.
이와 더불어 남화한인청년연맹에서도 1935년 3월 25일 상해 韓國人 居留民會 副會長과 고문을 역임한 바 있는 李容魯를 암살하였다. 이용로는 일본총영사관에 內報할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자들의 주소를 밀탐하여 체포를 도와 주었으며, 상해 재류의 한국인을 모두 거류민회에 입회시켰기 때문에 그를 총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같이 아나키스트계의 활동과 임정은 밀접히 연계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일제의 자료에도 이용로의 암살, 그리고 1935년 11월 7일 李泰瑞 암살사건 모두 남화한인청년연맹과 김구 및 안공근이 밀접히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Ⅸ. 결론
해방된 지 40년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일제 식민체제의 유산을 극복하지 못한 체 분단된 상태에서 고통을 겪고 있다. 우리를 암울한 식민체제의 질곡 속으로 몰아넣었던 일본은 오히려 패전 후의 민주화 과정을 통해 평화적 정권교체를 계속하면서 경제적 풍요를 누리는 반면, 소위 제국주의의 사슬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우리는 아직도 그들이 남겨 준 식민잔재를 거론해야 하는 처지에 있다.
해방후사에 있어 가장 큰 실패의 하나는 친일파 척결을 제대로 하지 못한 점이다. 한국사회가 현대적인 민족민주국가 건설에 실패하고 있는 것도 여기에서 기인하는 바 크다. 다시 말하거니와 남북분열과 친일세력의 집권, 친일군부 쿠데타, 이에 따른 민족정기의 훼손 등 제반 문제가 친일파를 척결하지 못한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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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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