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하 식민지기 조선과 대만의 공업정책과 민족공업에 관한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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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머리말

Ⅰ. 공업정책과 공업화의 일반적 양상
1. 식민지체제 기초공작기의 공업정책(1910년대 식민지공업의 생성기)
2. 식민지체제 확립기의 공업정책(1920년대 식민지 공업의 성장기)
3. 침략전쟁기의 공업 정책(1930년대 이후 식민지군수공업의 건설기)

Ⅱ. 민족공업의 존재양식

Ⅲ. 정미업의 분석
1. 경성의 정미업
2. 대만의 토롱간

맺음말

참고문헌

본문내용

터 소량씩 購入.蒐集하여, 이 大量의 벼를 가공하여 玄米로 만들고, 이것을 移出米商에게 가급적 高價로 판매하여, 그 差益을 얻는 것을 唯一의 목적"
) 前揭書, 78면.
으로 하였다.
토룡칸의 벼蒐集方法을 보면, 1930년대에 있어서 조차도 現物賣買, 寄倉賣買, 結價賣買 및 依時賣買라는 다양한 방법이 있었다. 현물매매는 문자 그대로 현물을 매매하는 것이기 때문에 토룡칸이라고 하여 특별히 싸게 벼를 매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나, 그 이외의 방법은 靑田賣買나 委託賣買 등의 先物賣買이기 때문에 高利貸나 投機의 方法을 통해서 헐값으로 벼를 買集할 수 있는 방법이 많았다. 그리고 쌀을 판매하는 경우에도 그들은 移出商인 三井物産, 三菱商事, 加藤商會 및 杉原産業의 4대 이출상에게 단순히 공급하는 데만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위의 이출업자들로부터 매집자금을 融通받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기는 하였지만, 비록 크게 성공하지는 못하였다고 하더라도, 그들 스스로 개별적으로 혹은 조합을 결성해서 이출상인으로 진출함으로써 보다 높은 販賣價格을 획득하려 노력했던 것이다. 이러한 토룡칸의 상업이윤의 추구는 경성의 조선인 정미업자의 加工利潤追求와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위와 같은 토룡칸의 특질은 臺灣商人의 특질에서 연유하는 것인데, 대만상인의 특질에 대한 다음과 같은 지적에 유의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특히 本島人은 임기응변, 변통자재로운 小規模企業을 끌고 돌아다니면서 零細한 遺利를 낚으면서 민첩하게 굴러다니는데 그 特色이 있으며, 自己搾取的인 공황에의 저항성이 있다고 하기 보다는, 경기변동 혹은 수급관계에 따라 기업의 伸縮轉換을 자유롭게 또는 용이하게 하여, 興廢는 있으나 상당히 끈질긴 지반을 가지고 있다.
맺음말
이 글은, 한국은 大企業中心經濟이고 대만은 中小企業中心經濟이며, 양국경제의 그러한 차이를 가져 온 具體的 要因은 초기축적의 차이라는 기존의 연구에서 얻어진 결론을 일단 받아들이면서, 식민지기의 兩國民族工業의 存在樣式에 대한 검토를 통하여 양국의 초기축적의 具體的 貌襲을 밝혀 보려고 하였다. 檢討結果는, B. 레비가 去來費用理論을 가지고 양국산업조직의 차이를 論 할 때 前提한 假說이, 妥當했다는 것을 確認해 주었다. 다시 말하면, 식민지기에 있어서도 대만은 조선보다, 經濟發展水準이 한 단계 앞서 있었기 때문에 去來費用이 낮고, 민족공업의 規模가 작았던 것이다.
식민지기의 대만의 공업은, 식료품공업의 비중이 始終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조선보다 공업화가 더디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산업별 總生産物의 비중을 보면, 대만의 공산물비중은 조선의 그것보다 越等히 높았으며, 商品經濟化의 정도도 대만이 조선보다 높았다. 이 글의 본격적인 검토과제였던 민족공업의 존재양식면에서도 대만의 민족공업이 조선의 그것보다 發達되어 있었다. 職工數 5人 이상의 중소기업에 한정해서 보면, 중소기업이 존재양식에는 큰 차이가 없어 보이나, 民族工業의 密度는, 대만이 조선보다 월등히 높고, 더 나아가 대만에는 조선에서는 그다지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는 1∼4인의 직공을 두면서 原動機를 사용하는 零細工業이 총공장수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압도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精米工業을 검토하여 본 결과, 양국의 민족공업의 존재양식의 차이는 더욱 뚜렷하였다. 여기서는 양국의 민족공업일반에서 들어나는 차이점이 보다 鮮明하게 드러남은 물론, 民族資本家의 존재양식에 있어서 커다란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대만의 土壟間은, 그 出自가 미곡상일 뿐만이 아니라, 정미업자라고는 하지만 단순히 加工利潤에만 의존하지 않고, 農村金融이나 肥料 등 농민의 구입품을 공급하거나 先物賣買를 통하여 流通利潤까지도 確保할 뿐만이 아니라, 景氣變動에도 기민하게 대처하는 데 대하여, 京城의 정미업자는 단순히 가공이윤을 추구하는 데 불과했다. 이러한 양국자본가의 資質의 차이는, 우연한 것이 아니라, 식민지화 이전의 경제발전단계의 차이에서 주어졌던 것이다.
위와 같은 여러 가지 점을 考慮할 때, 한국과 대만의 産業組織上의 차이는, 단순한 類型的 차이가 아니라 發展段階의 차이를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산업조직상의 문제를 다룰 때, 양국은 각각 그 特徵을 살려가면 된다는 安易한 處方에 만족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대만경제에 관해서는 아직 아는 것이 적어서 言及할 처지가 못되지만, 한국경제는, 오늘날 처한 어려움을 克服하기 위하여, 최소한 兩班式의 商法을 克服하지 않으면 안 될 것으로 보인다. 중소기업을 경영하는 경우, 대만에서는 全家族勞動力을 完全燃燒하는 零細企業이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去來當事者간에 信賴關係(trust)가 높기 때문에 각종의 신용거래나 하청관계가 가능했던 데 대비하여, 조선에서는 정미업에서 보는 바와 같이 他人勞動에의 의존율이 높고 商慣習이 제대로 발전되어 있지 못하였기 때문에 신용거래나 하청관계의 발달이 극히 低調했던 것이다.
) 大企業의 경우, 兩國 모두 官僚資本的 性格이 문제로 될 수 있다. 이 점은, 양국전통사회에 있어서의 國家的 土地所有와 이를 기초로 하는 官僚制社會와 관련하여, 보다 깊이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缺陷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각종의 制度改革에 의한 시장질서의 확립과 職業訓鍊을 통한 技能.技術의 향상 및 經濟倫理의 확립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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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2.17
  • 저작시기200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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