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선비정신과 유교정치문화의 특징적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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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론: 선비와 유교정치문화 및 양반관료문화

2. 선비의 연원과 생활 및 유형
1) 선비의 연원과 성립 과정
2) 선비의 생활과 유형

3. 선비의 가치관
1) 선비와 인륜
2) 선비의 신분관

4. 조선조 유교정치문화의 이념구조와 그 이데올로기적 기능
1) 유교정치이념의 기본구조와 그 이데올로기적 성격
2) 유교정치이념의 조선조적 적용양상과 구체적 함의

5. 조선조 유교정치문화의 규범체계와 현실적 기능
1) 성리학의 심화에 따른 인식론적 입장의 분화양상과 현실적 함의
2) 의리정신의 고양에 따른 명분론적 비판의식성향의 심화의 현실적 함의
3) 예숭적 풍토의 만연에 따른 명분론적 형식주의 의식성향의 고착화와 현실적 함의

6. 조선조 유교정치문화의 역할구조와 정치사회적 기능
1) 유교정치의 기본적 역할구조와 군신간의 역할분한
2) 조선조 도학정치에서의 특징적 역할구조와 기제
3) 조선조 사림집단의 붕당정치 운용양상과 그 정치사회적 기능

7. 선비 정신의 평가

8. 결론

참고자료

본문내용

다. 민주국가에서 역시 언론의 자유가 중요한 바탕이 됨은 물론이다.
셋째, 선비들의 학문 연구의 정신이다. 유학을 중심으로 수많은 서적과 문집을 간행하여 학문 발달을 도모하였다. 특히 15세기-16세기에 이르러 국내에서 성리학 연구가 절정에 달하여 이황, 이율곡 등과 같은 대학자를 배출하였다. 한편 18세기에 실학의 운동이 나타나고, 오늘날 우리의 근대적 사고의 원천을 여기에서 구하고 있지 않은가?
넷째는 국난 극복의 정신이다. 국가적 위기에 직면한 선비들이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앞장선 것은 개인의 평안보다 의(義)를 앞세웠기 때문에 가능했다.
한편 선비들의 유산 중에 부정적으로 평가받는 것도 없지 않다.
첫째, 그들의 신분 차별의 당위성이다. 대다수의 선비가 양반이고 보면 사농공상의 평등이 지켜질 리 없고 특히 노비들에 대해서는 재산으로 취급하여 매매까지 하였다.
둘째, 선비들이 학문에만 종사하고 농공상을 천하게 본 것은 결과적으로 산업 발전의 저하를 가져오고 문약(文弱)의 취약성을 가져왔다. 선비들의 사고는 현실성이 부족하고, 사회를 옳게 보려는 노력보다도 자기의 뜻한 바 신념대로 끌고 가려는 독단성이 강하였다. 무(武)를 천시한 결과 외적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것이다.
셋째, 선비들은 명분을 지나치게 내세우고 복고주의적 색채가 강하다. 한 번 벼슬에 종사했던 사람은 그 직책을 일생 동안 사용하거나, 조그만 회사에도 많은 중역이나 부장 등의 직책을 두는 것도 결국 헛된 이름과 직책만 좋아했던 잔재들이 아닌가 한다. 이와 함께 항상 고대의 학자나 정치가를 숭상하여 요순을 운운하는 것은 행복이나 번영의 표본을 장래나 새 세계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다 기준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것은 학문이 유학 일변도의 타성에 젖어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오늘날에 있어서 우리들의 정신의 근원을 선비정신에 두고 나름대로 계승하고 발전시켜서 현재의 지표로 삼는 것은 뜻있는 일이다. 신세대가 구세대를 완전히 부정한다면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선비정신이 우리들에게 무엇을 시사하고 있는 것인가를 살펴보는 것은 가치관의 혼란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많은 교훈을 줄 것으로 생각한다.
8. 결론
16세기 중반 이후 조선조 유교정치체제의 특징적 운영방식은 사림세력이 주도하는 붕당정치였다. 도학이념집단을 자처하는 사림세력이 당론을 매개로 집단적으로 현실정치에 참여하여 군왕을 능가하는 정치적 주도권을 행사하는 방향으로 체제가 운영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치현상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는 부정적인 시각이 지배적이다. 최근에 긍정적 시각으로 조선조 정치사를 재조명하려는 시도들이 있긴 하지만 그 구체적 논거를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
붕당정치라는 도학정치의 운영방식은 그 자체로서는 긍정, 부정의 어느 한 고정적 시각에서 평가될 성격이 아니다.그 실제적 운용 양상에 따라서 순기능과 역기능이 함께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이점에서 정치주체들의 지배적 가치정향으로서 정치문화가 구체적인 공과를 규정하는 핵심적 요소가 되는 것이다. 도학사상 역시 그것을 수용하여 구체적 현실에 반영하는 행위주체로서 정치주체들이 체득하는 가치정향이 얼마나 체계적이고 균형잡힌 것이냐에 따라 순기능과 역기능의 구체적 양상이 규정되는 것이다.
단상 - 전적인 긍정과 전적인 부정을 넘어
한 시대의 주도이념은 그 시대의 종말과 더불어 맹렬한 공격을 받게 된다. 왕조 패망에 이은 일제 식민통치 과정에서 유교는 '유교망국론'의 불명예스러운 평가를 받게 되었고, 식민사관 극복의 추구에도 여전히 정치이데올로기로서의 유교는 원죄성을 벗어버리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오백년 역사를 단일한 時點으로 환원하는 무시간적 이해와, 장·단점을 구분하지 않는 접근자세는 유교의 공과를 밝힐 수 없다. 유교는 무엇보다 '역사'이다. 조선시대 600년 안에도 많은 부침과 변화가 있었다. 그 자신 성균관 박사출신이기도 했던 유자 신채호가 비판하고자 했던 유교도 '역사적 유교'였으며, 그것은 유교의 본지(忠君愛國, 救世行道)를 상실하고 이욕에 빠진 유자들이 지배하는 '타락한 유교'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신채호의 유교비판은 '진정한 유교'를 위한 立論이라고 볼수 있다. 따라서 조선시대 유교정치문화 안에는 우리가 새롭게 하여 계승하여야 할 정치적 덕목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낡은 이데올로기가 병존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얻어진 결론은, 우선 조선조 유교정치문화는 ① 도학이념(종교적 지향)의 세계내적 실현을 위한 유교 지식인들의 열정과 참여, ② 정치주체로서 유자들이 겸비한 높은 도덕성, ③ 공론 형성을 통한 정치실현이라는 측면에서 긍정점을 가진다는 것이다. 반면 사림정치시대의 심화 이후에 주로 나타난 부정적 성향들로 ① 명분적 의리, 예론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 빚은 형식주의, ② 객관적 사상 투쟁보다는 가문, 학통에 치중하는 세력다툼 ③ 새로움에 대한 비개방성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조선시대 유교정치문화의 양면성은 유교 전체를 향한 전적인 긍정과 전적인 부정을 부적절하게 만든다.
이상의 평가에 덧붙여 지식인의 사회참여라는 측면을 중요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세계종교사, 정치사에 있어 조선시대만큼 정치주체들이 종교적 이념을 정치공간에서 철저히 실현시킨 사례는 희박할 것이다.
그점에서 지식인들의 사회참여의 한 전형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그 참여가 '기능적 참여'만이 아니라 '자기수양을 전제로 한' 진출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전형성을 획득한다. 오늘날 지식인은 기술만 있고 정신이 없거나, 이론만 있고 실천이 없거나, 권력에 좌지우지되는 유약성을 보이고 있다. 이런 지식인의 모습이 잔존하는 한 대동사회도, 소강사회도 불가능하다. 도의 실현이라는 종교적 비전을 가지고 현실정치에 주체로서 참여했던 조선조 유교 지식인들의 역사적 경험은, 새로운 문명을 준비하해야 하는 오늘날의 종교적 지식인들에게 강한 영감을 주고 있는 것이다.
참고자료
한국유교의 쟁점 (1999.3.31),
高靈邑誌
龍蛇世講錄
國朝榜目
韓相奎,선비정신의 교훈적 발견 <敎育思想硏究> 제3집 韓國敎育思想硏究會 1993, p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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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3.09
  • 저작시기2007.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98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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