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소동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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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소식(소동파)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序文

本文
1. 蘇軾의 生涯
2. 北宋의 時代的 狀況과 文學의 變化
1) 北宋의 時代的 狀況
2) 文學의 變化
3. 蘇軾의 詩
1)詩風
2)分類
3)詩의 特徵
4. 詩 鑑賞 - 거주지에 따른 작품 감상

結文

본문내용

해학(諧謔)이 분방한 낭만주의(浪漫主義)의 색채를 한결 짙게 하고 있지만, 시상(詩想)을 기협(氣俠)
) 호탕한 기상
적으로 끌어가지 않는 절제(節制)를 보이고 있다.
또 하나는 그의 출중(出衆)한 회화적인 처리법이다. 시에 응용된 원근법(遠近法), 소묘법(素描法), 공간처리법 등이 이를 말해준다.
그러나 소식의 경우 또한 결점이 없지 않다. 첫째는 의론(議論)화의 경향이요, 둘째는 전고(典故)의 남발, 세 번째는 너무 많은 교제시(交際詩) 때문에 빚어진 재화의 낭비이다.
4. 詩 鑑賞
- 거주지에 따른 작품 감상
1) 초기 벼슬 시절
소식은 동생 소철(蘇轍)과 함께 21세 때 개봉부 진사시에 응시하여 합격한다. 그의 과거시험 답안지 <형벌과 상은 충후함이 지극해야 한다는 것을 논함(刑賞忠厚之至論)>은 구양수(歐陽修)에게 찬양 받기도 한다. 그는 24살 되던 해 수도인 변경으로 수로를 이용해 가면서 산천문물과 명승고적을 두루 보게 된다. 여기서 그는 최초의 작품들이자 그의 시가창작에 기점이 되는 시를 쓰게 된다. 25세 때 수도에 도착했으나 관직에 부임하지 않고, 아우와 같이 시험을 준비하였으며 합격한다. 그러나 송나라는 점차 쇠하고 있었고 관료기구를 지나치게 방대하게 하여 부패와 무능을 낳았다. 이에 그는 "국가재정의 결핍, 군대의 나약함, 관리 선발의 불공평성"이라는 3대 폐단에 대한 개혁방안을 제시한다. 개혁파에 속해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소식은 그의 시에서도 민생을 반영하고 있다.
<十二月十四日夜微雪, 明日早往南溪小酌之晩>
南溪得雪眞無價, 走馬來看及未消.
得自披棒尋履跡, 最先犯曉過朱橋.
誰憐屋破眠無處, 坐覺村飢語不器.
惟有暮鴉知客意, 警飛千片落寒條.
남계에서 내리는 눈을 맞으니 실로 감개가 무량하여,
말 타고 달려가 보니 눈이 채 녹지 않았다.
홀로 개암나무 숲 헤치고 사람 발자국 찾았으나,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쌓인 첫 새벽 길에 다리를 지난다.
누가 불쌍히 여기랴 집은 허물어져 잠잘 곳 없는 백성들,
마을 사람들이 기아에 허덕여 떠들 기운도 없음을 즉시 깨달았네.
오직 저녁 갈가마귀 만이 내 뜻을 아는 듯,
놀라 푸드덕 날아가니 눈꽃이 찬 나뭇가지에서 흩어져 내린다.
칠언 율시(律詩)로써 소식이 남계로 눈 구경을 가서 첫 번째로 눈을 밟은 나그네임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다가 전환하여 서글프고 처량한 정경을 묘사하면서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는 마을 사람들의 슬픔을 더욱 돌출하고 있다. 그는 5구에서는 두보(杜甫)를, 6구에서는 두목(杜牧)의 시구를 빌려 자신의 시를 구성하고 있다. 이것은 더욱 생동감을 느낄 수 있게 만들고 있다. 이렇게 소식은 자신의 체험에서 출발하여 큰 눈 속에서 일하는 백성의 빈궁(貧窮)한 생활에 더욱 깊은 이해를 하게 된다.
소식은 또한 당시의 폐단(弊端)을 지적(指摘)하는 시들을 창작하였다.
< 塢>
衣中甲厚行何懼, 塢裏金多退足憑.
畢竟英雄誰得似, 臍脂自照不須燈.
겉옷 속에 두터운 갑옷 입고 다니며 무엇이 두려웠으랴,
미오성 안에 값진 재물 저장해 두어 은퇴해도 믿을 곳 있었다.
결국 고금의 영웅 중에 누가 동탁과 닮았을까,
죽어서는 배꼽기름이 활활 타올라 등불조차 필요 없었다네.
후한말의 동탁(董卓)을 조롱한 시이다. 간악한 재상(宰相) 동탁은 자객(刺客)이 두려워 옷 안에 두터운 갑옷을 입어 생명의 안전을 도모(圖謀)하였다. 또한 백성의 고혈(膏血)을 짜서 자신의 근거지에 모아두었으나 뒷날 실패해 장안에 시체를 드러내었는데 그의 살찐 몸에서는 기름이 흘러 넘쳤다고 한다. 사람들이 그를 미워하여 배꼽에다 등심지를 박아 불을 붙여 며칠 동안 태웠다.
이는 당시 백성의 재물을 모아들이는 관료귀족에 대한 엄중한 경고이기도 하다.
또한 이 시기 소식의 시는 예술적으로도 성숙하였다. 그의 근체시(近體詩)는 생동적(生動的)이며 정취(情趣)가 풍부하다고 볼 수 있다.
<和子由 池懷舊>
人生到處知何似, 應似飛鴻踏雪泥.
泥上偶然留指瓜, 鴻飛那復計東西.
老僧已死成新塔, 壞壁無由見舊題.
往日崎嶇還記否, 路長人困蹇驢嘶.
인생길 가는 곳 무엇과 같은지 아는가,
응당 눈과 진흙위에 쉬어간 기러기의 발자취와 같으리라.
진흙 위에 우연히 남겨진 발톱자국,
기러기 날아가면 어찌 날아갈 방향을 헤아리겠는가.
노승은 이미 열반에 들어 새 사리탑 들어섰고,
허물어진 벽에는 우리가 쓴 옛 시구 찾을 길 없네.
지난 날 험했던 길 아직 기억하는가,
길은 멀고 사람은 피곤하고 절름거리던 노새는 울고 가더라.
이 시는 첫 줄부터 인생이 도처에서 그 얼마나 무상(無常)한가를 자유(自由)에게 묻고 있다. 그는 녹아야 하고 지워져야 하는 눈이나 흙 위에 놓인 새 발자국에 자신의 정치생명을 비유한 것이 아닐까 한다. 기러기의 발자취는 허공을 날다 잠시 쉬어간 흔적일 뿐이다. 사람의 살아간 흔적도 이와 같아서 흘러가는 세월 따라 순간순간 속절없이 망각 속에 잠기고 만다. 게다가, 나귀등에 몸을 싣고 이 고을 저 고을로, 이 관아 저 관아로 돌고 돌며 지방관리의 고달픈 경력을 엮어 가야 했다. 끝도 한도 없이 가렴주구(苛斂誅求)에 시달려 온 가난한 백성들, 그들의 편에 서서 함께 슬픔을 나누어야 했다.
이것은 그대로 그의 시의 소재가 되었다. 기구한 생애와 농민들의 뼈를 깎는 아픔이 곧잘 직유(直喩)와 은유(隱喩)로 배합(配合)되어 그 속에 담긴 진실을 읽는 이가 더욱 비감(悲感)하게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백성들을 생각하면서 그 또한 정치적으로 혼란한 당쟁(黨爭)에 휘말리게 된다.
2) 지방관 시절
그는 36세 때 수도를 떠나 항주로 도착하게 된다. 그는 8년 동안 항주(抗州), 밀주(密州), 서주(徐州), 호주(湖州)의 지방관으로 지내면서 백성의 고통에 관심을 가지고 탁월한 공적을 발휘하는 훌륭한 관리임을 나타낸다. 동시에 문학적 재능을 충분히 발휘해 풍성하고 활발히 문학 창작을 펼치게 된다. 그에게 항주는 두 번째 고향과 같았으며 남방 특유의 쾌활함은 그의 성격에 부합하였다. 그는 항주를 사랑했고, 항주 백성들 또한 그를 사랑했다.
특히 항주(抗州)에서 서호(西湖)를 묘사한 시는 항상 사람들이 애송(愛誦)하는 명구(名句)가 되었다.
<六月二十七日望湖樓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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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4.16
  • 저작시기20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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