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한문학의 특징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32
  • 33
  • 34
  • 35
해당 자료는 10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10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조선시대 한문학의 특징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 序 -
-시대구분-

1.조선전기의 한문학
조선전기의 시대적양상
1)왕조교체기의 한문학
2)관각문학과 사림문학
3)방외인 문학
참고자료 : 동문선과 해동강서시파

2.조선중기의 한문학
조선중기의 시대적양상
1)중기의 작가들
2)삼당시인
3)한문사대가
4)여류한문학

3.조선후기의 한문학
1)조선후기의 시대적양상
2)후기한시의 새로운 경향
3)위항문학의 발달
4)시선집의 간행(소대풍요,풍요속선,풍요삼선)
5)실학문학의 발달
6)한말사대가

본문내용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絶命詩
亂離袞到白頭年 난리를 겪다 보니 白頭年 되었구나.
幾合捐生却末然 몇 번이고 목숨을 끊으려다 이루지 못했도다.
今日眞成無可奈 오늘날 참으로 어찌할 수 없고 보니
輝輝風燭照蒼天 가물거리는 촛불이 蒼天에 비치도다.
妖氣掩帝星移 요망한 기운이 가려서 帝星이 옮겨지니
九闕晝漏遲 九闕은 침침하여 晝漏 더디구나.
詔勅從今無復有 이제부터 조칙을 받을 길이 없으니
琳琅一紙淚千絲 구슬 같은 눈물이 주룩주룩 조칙에 얽히는구나.
鳥獸哀鳴海岳嚬 새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네.
槿花世界已沈淪 무궁화 온 세상이 이젠 망해 비렸어라.
秋燈掩卷懷千古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 날 생각하니,
難作人間識字人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하기 어렵기만 하구나.
曾無支厦半椽功 일찍이 나라를 지탱할 조그마한 공도 없었으니
只是成仁不是忠 단지 仁을 이룰 뿐이요, 忠은 아닌 것이다.
止竟僅能追尹殺 겨우 능히 尹穀을 따르는 데 그칠 뿐이요,
當時愧不陳東 당시의 陣東을 밟지 못하는 것이 부끄럽구나.
[金澤榮, 1850~1927]
본관 花開. 자 于霖. 호 滄江. 당호 韶護堂主人 개성에서 태어났다. 1891년 진사가 되고, 1894년 編史局主事, 1895년 中樞院書記官을 지내다가 이듬해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1903년 다시 弘文館纂集所에 보직되어 文獻備考續撰委員으로 있다가, 뒤에 通政大夫에 오르고 1905년 學部 편집위원을 역임하였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국가의 장래를 통탄하던 중 1908년 중국으로 망명, 퉁저우[通州]에 살면서 학문과 문장수업으로 여생을 보냈다. 특히 古詩에 뛰어나 문장과 학문에서 청나라 캉유웨이[康有爲]·鄭孝胥와 어깨를 겨누었다.
저서에 《韓國小史》,《韓史》,《崧陽耆舊傳》,《校正三國史記》,《重編韓代崧陽耆東史輯略舊傳)》이 있다.
기러기 소리를 듣다 / 金澤榮
明河初鹽別書堂 은하 처음 일렁일 적에 서당을 나섰는데
錦水邊山驛路長 금강 지나 변산 가는 길 아득히 멀고 멀다
鴻雁後飛過我去 기러기 뒤에서 날아 앞질러 지나가니
秋風秋雨滿江鄕 가을바람 가을비가 강 마을에 가득하네
참고자료
[申緯, 1769~1847]
詩 · 書 · 畵의 三絶이라 불렸던 조선 후기 문신 겸 시인, 서화가. 저서로는 《警脩堂全藁》, 《焚餘錄》 등이 있다.
본관 平山. 자 漢. 호 紫霞 · 警脩堂. 신동으로 소문이 나서 14세 때 正祖가 궁중에 불러들여 칭찬을 하였다. 1799년(정조 23) 문과에 급제, 벼슬은 도승지를 거쳐 이조 ·병조 ·호조의 참판에 머물렀으나, 당시 詩 · 書 · 畵의 三絶이라 불렸으며, 후세의 시인들도 그의 作詩法을 본받았다. 筆法 · 畵風도 神境에 이르렀으며, 아들 命衍이 부친의 유고를 거두어 문집을 엮었다. 저서로는 《警脩堂全藁》,《焚餘錄》,《申紫霞詩集》 등이 있다.
<蝴蝶靑山去> -申緯, 小樂府 中-
白蝴蝶汝靑山去 흰 나비야 너도 가자 청산 가자.
黑蝶團飛共入出 범나비도 무리 지어 함께 들고 나자.
行行日暮花堪宿 가다가 날 저물면 꽃에 들어 자고 가자.
花薄情時葉宿還 꽃에서 푸대접하거든 잎에서나 자고 가자.
[金正喜, 1786~1856]
본관 경주. 자 元春. 호 阮堂·秋史·禮堂·詩庵·果坡·老果. 충청남도 예산에서 출생하였다. 1809년(순조 9) 생원이 되고, 1819년(순조 19) 문과에 급제하여 世子侍講院說書·충청우도암행어사·成均館大司成·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24세 때 燕京에 가서 당대의 巨儒 阮元·翁方綱·曹江 등과 교유, 經學·金石學·書畵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그의 예술은 시·서·화를 일치시킨 고답적인 이념미의 구현으로 고도의 발전을 보인 淸나라의 고증학을 바탕으로 하였다. 1840년(헌종 6) 尹尙度의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1848년 풀려나왔고, 1851년(철종 2) 헌종의 廟遷 문제로 다시 북청으로 귀양을 갔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학문에서는 實事求是를 주장하였고, 서예에서는 독특한 秋史體를 대성시켰으며, 특히 예서·행서에 새 경지를 이룩하였다. 그는 함흥 黃草嶺에 있는 신라 眞興王 순수비를 考釋하고, 1816년에는 북한산 비봉에 있는 석비가 조선 건국시 무학대사가 세운 것이 아니라 진흥왕 순수비이며, ‘진흥’이란 칭호도 왕의 생전에 사용한 것임을 밝혔다. 또한 《實事求是說》을 저술하여 근거 없는 지식이나 선입견으로 학문을 하여서는 안 됨을 주장하였으며, 종교에 대한 관심도 많아 베이징[北京]으로부터의 귀국길에는 불경 400여 권과 불상 등을 가져와서 麻谷寺에 기증하기도 하였다. 70세에는 과천 관악산 기슭에 있는 先考墓 옆에 가옥을 지어 수도에 힘쓰고 이듬해에 廣州 奉恩寺에서 具足戒를 받은 다음 귀가하여 세상을 떴다. 문집에 《阮堂集》, 저서에 《金石過眼錄》 《阮堂尺牘》 등이 있고, 작품에 《墨竹圖》 《墨蘭圖》 등이 있다.
配所輓妻喪 ( 秋史 金正喜 )
聊將月老訴冥府 월하노인 통해 저승에 하소연해
來世夫妻易地爲 내세에는 우리 부부 바꾸어 태어나리
我死君生千里外 나는 죽고 그대만이 천리 밖에 살아남아
使君知有此心悲 그대에게 이 슬픔을 알게 하리라
[李彦, 1740 ∼ 1766]
본관은 江陽 자는 虞裳, 호는 松穆館이다. 영조35년에 역과에 합격. 사역원주박 역임. 중인 출신의 역관이자 조선 후기 독특한 시풍으로 당시 문단의 주목을 받았던 천재 시인이다. 20세 때 과거 역과에 합격한 뒤 통역관으로 활동하면서 2,000여수가 넘는 시를 남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26세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하면서 자신의 원고를 불살라 남은 글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의 사후 후손과 역관 이상적 등이 불타고 남은 시문 300여 편을 모아 ‘松穆館燼餘稿’라는 이름으로 조선과 중국 두 곳에서 펴냈다. 또 李德懋, 이용휴, 유만주 등 동시대 문인들은 이언진의 전기와 시에 대한 기록을 통해 그의 천재성을 기렸다. 특히 연암 박지원은 ‘우상전’을 통해 “문장으로 나라를 빛낸 사람”이라며 이언진의 문학적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
학계에서는 우상을 각각 26세와 28세에 요절한 당나라 시인 李賀(790~816)와 시인 尹東柱(1917~1945)에 빗대 ‘조선의 이하’, ‘조선의 윤동주’라 부른다.

추천자료

  • 가격3,000
  • 페이지수35페이지
  • 등록일2007.05.10
  • 저작시기2006.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08804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