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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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를 제시하고 또다시 새로운 목표달성을 독려했다. 예를 들면 1964년의 수출목표는 사상처음으로 1억 달러 넘어선 1억 2천만 달러였다. 그 후 1970년까지 10억 달러 수출목표가,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1980년대 초까지 100억 달러 수출목표가 제시되었다. 박 대통령은 ‘조국근대화’라는 원대한 비전을 제시하고 그것이 진척되어 가는 정도를 보여주는 지표로 1인당 GNP나 수출목표액을 제시했던 것이다. 박 대통령은 정보에 능통하며 치밀하고 계획적이다. 매사에 주도면밀하고 사소한 것까지도 직접 확인하는 성격이었다. 대통령 자신이 먼저 관련된 정보와 지식을 습득하고 직접 정책을 구상하며, 정책 시행상의 구체적인 내용까지 파악하는 철저함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박 대통령은 판단력과 추진력을 겸비하여 목표를 정하면 끝까지 밀어 붙어 결판을 내고 마는 집념가였다고 할 수 있다.
박정희는 조국근대화라는 비전을 달성하기 위해 많은 정책들을 추진했고, 어떤 경우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무모한 도전도 마다하지 않았다. 1965년 서독을 방문한 박 대통령은 서독의 고속도로 아우토반을 시속 160Km로 달려 보고, 귀국한 후 기술·장비·자본 등 열악한 조건을 극복하고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계획하여 추진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야당에서는 이것이 필요하지도 않고 성공할 수 없고,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까지 맹렬히 비난했다. 뿐만 아니라 세계은행, 국제금융기관 그리고 우방국들까지도 무리한 욕심이라고 만류하고 나섰다. 박 대통령은 이러한 비난과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역사를 강행해 나갔다.
이렇게 무모하다고 생각되는 대역사가 성공할 수 있었던 데는, 청와대 집무실에 앉아서 지시하는 ‘탁상 행정’이 아니라 직접 현장을 발로 뛰는 ‘확인 행정’을 통해서 가능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스스로 중앙이나 지방관서, 그리고 민간기관과 사업장들을 가리지 않고 직접 방문하면서 정책추진 상황을 확인·점검하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처방을 구하고 지시하는 등 새로운 스타일의 행정을 펼쳤다. 대통령은 매해 연초마다 중앙과 지방의 행정조직들을 순시하면서 전년도의 실적을 보고받고 신년도의 계획을 청취하는 일을 한번도 거른 일이 없었다. 이러한 현장 지도는 구가 비전의 실현을 위한 계획을 실천하도록 자극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현장지도는 현장의 근로자들로 하여금 대통령의 관심과 애정을 확인하도록 함으로써 생산성을 높이도록 자극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행정 스타일은 현장과 실무자를 중시하는 태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어떤 결정을 내릴 때는 반드시 실무자에게 직접 사실 관계를 확인해 가면서 결정을 내렸고, 현장으로 찾아가 현장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즉석에서 현장의 고충을 해결해 주기도 했기 때문에 현장의 실무자들의 사기를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정치적 의사결정은 독단적이고 비민주적이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경제정책을 결정하는 데는 철저하게 상향식 의사를 존중했고 민주적 의사결정 방식을 채택했다. 박 대통령은 어떤 국가적 프로젝트를 설정하든지 민간 부문을 포함하여 광범위한 의견을 수렴한 후 신중한 결정을 내렸다. 특히 그 과정에서는 일차적으로 주무장관들의 의사와 자율권을 최대한 존중했다. 또한 장관 스스로의 정책이 실천된다는 외형적 절차를 갖추려는 배려를 항상 잊지 않았다. 만약 해당 사안이 중대하다고 판단할 경우 대통령은 자신을 포함하여 관련자들 간의 심도 있는 토론과 협의 과정을 거쳐 정책 결정을 하는 절차를 거쳤다.
또한 회의진행 방식도 늘 회의 참석자들의 의견을 경청하는 형식을 취했다. 그는 회의 때 자신이 먼저 지침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대통령이 먼저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말하면 아랫사람들이 거기에 구속되기 때문이다. 대신 박 대통령은 회의 참석자들이 말하는 것을 받아 적고 토론이 활발하게 진행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자신이 모르는 것을 배우는 기회로 활용했다고 한다.
대개 어떤 조직의 결정이 관료적 구조를 통해서 하향식으로 이루어지면서 ‘병목현상’이 생길 수밖에 없다. 즉 대통령에게 ‘직보’를 하는 사람이 현장과 하부조직의 모든 희사들을 대통령에게 전달하기 어렵기 때문에, 마치 병이 목 부분으로 갈수록 좁아지는 것처럼, 관료제적 구족 속에서 다양한 의견들이 걸러지게 마련이다. 그로 인해 폐쇄적인 의사소통이나 왜곡이 나타날 수 있고 결국에는 결정의 실질성이나 현장성이 떨어지게 마련이다. 이런 점에서 박 대통령은 현장형이며 실무형의 행정적 관리자였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박 대통령의 경영력은 비범했다. 그리고 ‘목표 관리’와 ‘속도 경영’에 능했다. 1964년 처음으로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한 뒤 1970년대에 10억 달러, 이후 1백억 달러의 목표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행정부와 국민에게 끊임없는 목표(비전)를 제시하고 이를 확인·점검했다.
6) 평가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나누어지고 있다.
첫째, 긍정적인 평가이다.
박정희는 경제적으로 농업국가를 산업국가로 변화시켰고, 새마을 운동으로 도시와 농촌의 빈부의 격차를 축소시키는 한편 주택 현대화에도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경제를 발전시킨 것이 가장 큰 업적으로 봐야 할 듯 하고, 비교 범죄율이나 사회 잡범 등이 적어서 서민들이 느끼는 안정감은 컸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기술자 장려로 우수한 산업일꾼을 배출한 정책, 군 현대화와 자주국방 초석 마련등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으로 평가 된다.
둘째, 부정적인 평가이다.
독재를 하려고 했던 모습, 대통령 선출의 부적합성등이 가장 대표적인 부정적인 모습이다.
박정희는 정당한 방법으로 대통령이 되지 않았고, 김종필 등과 5.16 쿠테타를 일으켜 정권을 강제로 강탈한다. 또한, 독재를 위한 헌법의 무한정 개정을 한다. 박정희는 자기의 권력을 유지시키기 위해, 헌법에서 대통령은 3번까지만 출마할 수 있다고 규정해 놓은 것을 대통령은 무제한 출마할 수 있다고 고쳐 놓는다.
이처럼 박정희는 사후 30년이 다 되어 가지만 그 평가를 놓고 찬·반 양론이 팽팽이 되립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 가격3,300
  • 페이지수21페이지
  • 등록일2007.05.22
  • 저작시기2007.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1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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