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도자기에 대한 모든 것!!!
본 자료는 4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해당 자료는 4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4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역사]도자기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도자기 유래
1) 신석기시대
2) 청동기시대
3) 철기시대
4)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
5) 고려시대
6) 조선시대

2. 도자기 만드는 방법

3. 도자기 특징
1) 원료
2) 성형
3) 소성
4) 시유 · 채식

4. 도자기의 종류
1) 청자
2) 백자
3) 분청사기

5. 다른 지역 도자기 역사
1) 서아시아·이집트
2) 고대이집트
3) 이슬람세계
4) 유럽
5) 중국

6. 이천 도자기 역사

7. 여주 도자기 역사

본문내용

음을 알게 해준다.
이렇듯 조선 중기에 지역 특산물로 손꼽힐 만큼 활발하던 도자기 제작은 후기로 접어들면서 점차 쇠퇴하게 된다. 이는 16세기 후반 무렵 이웃한 광주군에 관요인 사옹원 분원이 설치되고 이에 필요한 인력으로 이천 지역 도공들을 징발했던 것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18세기 중반에 편찬된 <여지도서> 군병조의 '사옹원 장인보 30명'이나 19세기에 간행된 <이천부읍지>의 '사옹원 자기장인보 30명' 징발 기록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이처럼 이천 지역 도공들을 광주군 관요로 차출하면서 현지의 도자기 생산은 위축되었을 것이고, 또한 차출을 피하기 위해 도공들 스스로 도예업을 그만두거나 전업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왜냐하면 분원 사기장이 해마다 도망하여 법정 인원을 채울 수 없다는 1625년 <승정원일기> 기사처럼 분원의 사기장 일은 고되고 힘들었기 때문이다. <여지도서> 물산조에서 이 지역 특산물이던 도기가 '예전에는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고 한 것은 이러한 사정을 반영한 것이라 하겠다.
조선 후기 이래 맥이 끊긴 이천 도자기가 오늘날 다시 이름을 얻고 이천 지역이 전승 도예의 메카로 거듭날 수 있었던 그 중심에는 바로 수광리가 있었다. 도자기 생산이 쇠퇴하면서 이천 지역 곳곳에서는 옹기를 제작했는데, 그 중에서도 신둔면 수광리와 백사면 조읍리 점말, 장호원읍 노탑리 등지는 한국 전쟁 이후 1960년대까지 옹기가 제작되었다.
칠기 제품 생산지역 특히 신둔면 수광리에서는 당시 '대단히 건실한 솜씨인 칠기 제품이 생산되고 있었다'고 한다. 칠기는 옹기의 일종으로 유약이나 손가락을 사용해서 무늬를 그려 넣는 장식기법에서는 옹기에 가깝지만, 정선된 사토와 점토를 사용한다든가, 물레성형과 굽깎기를 하고 두벌구이를 하는 등 제작 기법 측면에서는 오히려 도자기와 흡사했다.
따라서 처음에 백자를 굽던 이 지역 도공들이 제작이 용이하고 실용성이 있는 옹기 제작 기법을 도입하여 만든 것이 칠기였고 그 전통이 일제시대를 거쳐 1950년대까지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당시 신둔면 수광리에는 칠기가마가 두 개 있었는데, 하나는 수광1리 미나리 칠기가마(현재 수광리 12번지 일대)였고, 또 하나는 수광2리의 칠기가마(현재 광주요 자리)였다. 이 칠기가마를 매개체로하여 1950년대 후반부터 수광리에 정착한 유근형, 지순탁, 조조수씨 등의 도공들이 요장을 열면서 이천도예촌의 역사가 시작된다.
1999년 현재 수광리에는 설립한 지 20년 이상 된 요장이 6개 있다. 광주요(조태권), 고려도요(지수구), 해강고려청자연구소(유광렬), 이조요(홍재표), 가천요(송기영), 항산도예(임항택)가 그것으로, 이 요장들은 이천 지역 전체 20년 이상 된 요장 14개 가운데 절반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도자기 분야와 제작 방식도 다양해져 해강고려청자연구소는 청자에 주력하고 있으며, 고려도요, 이조요, 항산도예는 백자분야에, 광주요, 가천요 등은 분청사기 분야에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이처럼 수광리 도예촌은 조선 후기 이래 끊어진 이천 도자기를 현대적으로 계승하면서 이를 확대 발전시킨 이천 도자기의 중심이자 전통도예의 메카였던 것이다.
7. 여주 도자기 역사
여주도자기의 역사는 1999년 3월 국립중앙박물관의 여주지역 도요지 지표조사 과정에서 북내면 중암리 고려백자 가마터가 발견되면서 2001년 7월부터 경기도박물관에서 2차에 거쳐 발굴 조사한 중암리 고려백자 가마터를 통해 고려 초부터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가마터는 용인 서리 가마터와 함께 우리나라 도자기 발생의 초기상황과 변천과정은 물론 초기 백자의 편년연구에 있어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조선시대 때는『세종실록지리지』에 ‘도기소 하나가 여주 관청의 북쪽 관산에 있다’라고 기록되어있을 만큼 여주지역은 도자사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여주는 예부터 싸리산을 중심으로 도자기의 원료인 고령토와 백토층이 출토되어 일찍부터 도자기가 발달되어 〔동국여지승락〕같은 문헌에서도 자기와 도기를 여주의 특산물로 꼽았다.
일설로는 여주 싸리산에서 생산되는 도자기원료인 고령토를 광주분원에서 뱃길로 운반해 사용하였는데 광주분원이 쇠퇴해지자 도공 5명이 북내면 오금리로 이주해 자기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대외적으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16세기말 전국의 도기소와 자기소는 200여 군데였는데 여주에도 북내면 오금리와 금사면에 도기소가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말미암아 조선도예는 큰 타격을 입었다. 수많은 도공들이 일본으로 잡혀갔고 대부분의 요장이 파괴되었다. 겨우 명맥을 유지한 백자는 광해군 말기에 이르러서야 그 빛을 되찾기 시작했다.
여주지역은 17세기 말부터 도자기 원료공급이 용이한 곳으로 이름나기 시작하여 “백자의 고장”이 되었다. 이 무렵에는 도요지도 늘어나 북내면 운촌리, 상교리, 석우리와 산북면 상품리, 가남면 삼군리, 능서면 번도리, 여주읍등지에서도 도자기가 생산되었다.
1884년에 광주분원이 없어지자 김현채를 비롯한 몇사람의 도공이 여주에 정착해 오금리 출신 함기순, 한호석, 김문배등이 요강과 막사발을 제작, 전국으로 보급했다.
1932년 조선총독부 중앙시험소의 보고서에 따르면 여주시험 소의 직원으로 이임준 기술과장, 한호석 서무과장과 직원으로 지순택, 고명순 등이 있었고 조각사로 해강 유근형이 근무했었다고 한다. 이것으로 미루어 유근형, 지순택씨 등이 여주에서 젊은 시절 도예를 배웠음을 알 수 있다.
1930년대 일본인 아사카와 히쿠교의 조사결과에 의하면 고려말기부터 조선후기에 이르기까지 북내면 운촌리, 상교리, 석우리와 가남면 맹골리, 금사면 상품리, 여주읍 읍내리, 능서면 심도리 등지에서 18개소의 가마터가 있었으며 상감청자와 백자, 분청사기 등이 만들어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의 열악한 상황 하에서도 도자기의 전통은 면면히 이어져 1950년 5개의 생활도자기 공장이 새로 설립되었고 1960년 후반에는 도자기 산업의 호황으로 많은 공장이 설립, 운영되었으며 1970년에는 40개소, 1980년에는 100개소 등이 늘어나 현재는 600여 개의 도자기 공장이 여주 도자기 생산을 주도하고 있다.

키워드

  • 가격1,500
  • 페이지수14페이지
  • 등록일2007.07.15
  • 저작시기2007.7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20836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