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군사제도 정비와 외교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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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세종의 군사제도 정비와 외교정책
<목 차>
Ⅰ. 서론

Ⅱ. 본론
1. 군사제도의 정비와 국방
1) 중앙 군제의 정비
2) 지방군제의 정비와 국방
3) 화기(火器)의 발달과 국방
2. 대외관계
1) 대명관계
2) 대여진관계와 북방개척
3) 대마도정벌과 대일본관계

Ⅲ.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閏正月 壬辰, “命禮曹判書許稠 答都都熊瓦書曰······對馬島隸於慶尙道 凡有啓稟之事 必須呈報本道觀察使 傳報施行······”.> 이들은 그 뒤에 곧 구주(九州) 일대의 제후들의 압력으로 대마도주는 다시 신속을 번복하기도 하였으나 이후 다시 통교(通交)가 열렸다.<주: 世宗實錄 卷10, 2年 10月 癸卯.>
이 대마도 정벌이 왜구의 소굴을 완전히 소탕하지는 못하였으나 대일본관계에 있어서는 중대한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여말 선초에 걸쳐 영진군이나 기선군을 강화한 것은 바로 왜구 방비에 목적이 있었고 태종대부터 화기(火器) 발달을 가져 온 것도 바로 이 왜구에 대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대마도 정벌로 조선의 군사력이 막강하다는 것이 증명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세종 일대에는 왜구가 격감되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교역상의 통제를 가해도 그들이 반발하지 않는 결과를 가져 왔다. 이러한 상황은 여진 침입을 물리치고 국경 경비를 강화하는 데 많은 국방력을 돌릴 수 있게 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세종대의 교린책은 여진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처음 회유책을 쓰다가 강경책으로, 일본에 대하여는 먼저 강경책을 썼다가 회유책으로 전환하면서 남왜(南倭)에 대한 우려가 줄어들었다고 보여진다.
세종 5년에 태종이 사망하자 세종은 일본에 대하여 다시 회유책을 써서 대마도와의 통교를 허락하였다. 건국 초기에는 공적사적인 왜인들이 무질서하게 우리 나라 남해안 일대에 무역선들이 도박(到泊)함으로써 국방상사회상의 많은 문제가 발생하였기 때문에 태종 7년 부산포와 내이포(제포=웅천)를 한정하여 도박처로 정해주어 여기에서 무역 거래를 하게 하고 접대도 여기서 행하도록 하였는데, 세종 8년에는 다시 남포(鹽浦 : 울산)를 개항하니 이것이 삼포개항(三浦開港)인 것이다.<주: 世宗實錄 卷31, 8年 正月 癸丑.> 이 삼포는 왜인의 왕래만 허락한 것으로 그들의 볼일이 끝나면 곧 돌아가야 했으나 왜인 가운데에는 돌아가지 않고 영주하는 항거왜인(恒居倭人) 수가 급증하고 이들의 횡포도 심하여 대마도주에게 항의해도 여의치 못하였다. 이에 세종은 다시 이들을 통제하기 위하여 그의 25년 대마도와의 사이에 계해약조(癸亥約條)를 체결하여 진상 무역선인 대마도주의 세견선(歲遣船)의 수를 제한하고 왜구 금압의 목적으로 주는 세사미두(歲賜米豆)도 200석(石)으로 제한하였다.<주: 申叔舟, 海東諸國紀 朝聘應接紀.> 이와 같이 회유책을 쓰되 무질서한 왜인의 왕래를 제한했던 시기가 세종이 북방경략을 적극화하던 시기인데도 왜인들이 반발하지 않았다는 것은 바로 세종대에 있어서는 북방경략 일변도의 방비가 아니라 왜에 대한 방비도 소홀히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Ⅲ. 결론
이상에서 세종대의 ‘국방과 외교’에 대하여 지극히 개설적으로 서술하여 보았다.
세종대는 국방과 직결되는 군사 제도를 정비 강화하여 사실상 다음 세조 대의 5위와 진관체제의 모태가 되게 하였다. 중앙군은 태종 이래로 갑사 등 전문적 특수병을 중심으로 편제되었는데, 이를 세종대에는 대폭 증액 강화하고 번차 등을 통하여 하번(下番) 군사가 각 지방별로 파악되면서 지방군 강화에 도움을 주어 중앙군이 국방력으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지방군은 남방 지대의 영진군, 북방 지대의 익군체제로 정비되었으며, 기선군을 강화하여 북로남왜에 대비하였다.
뿐만 아니라 태종 이래의 유명무실하였던 잡색군을 재정비하였다. 이 잡색군은 국가 총동원 태세의 강화인 것이다. 그러나 세종대에는 한번도 잡색군이 동원되지 않았다. 이는 세종대가 온 나라를 들어서 싸울 만큼의 누란의 위기가 한번도 없었다는 것으로 국방력이 그만큼 강화되고 있었음을 말한다. 또한 세종대에는 왜구 진압을 목적으로 많은 화기들이 개량되고 발명되기도 하였던 시기였다. 그러나 이들 화기 발달의 처음 목적이 왜구에 대비하는 것이었으나 대마도 정벌 이후는 주로 그 목적이 북방족에 대비하기 위함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세종대의 외교에 있어서는 이른바 사대교린의 기본적인 질서가 성사된 시기였다. 대명 관계는 건국 초기 원만하지 못하였던 관계를 넘어 세종대에는 금은(金銀) 세공을 면제받았으며, 처녀 택송의 악례가 청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때로 금은 세공의 면제로 광산이 폐광되어 광공업의 부진을 가져왔다고 하는 이도 있으나 필자가 볼 때는 외교적으로 대단한 승리였다고 여겨진다. 광산의 개발은 그 후대의 국왕이나 정부 관계자에게 넘겨진 과제인데, 사대국이 무서워 개발하지 못하다가 아관파천기에 외국인에 그 개발권이 넘어가게 하였으니, 이는 세종의 잘못은 아니다.
한편 북방족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회유책과 적극책을 썼다. 세종 초기에는 가급적 소극적인 회유책을 써서 그들 북방족을 분리 통제하였으나 그들이 변경에 침습해 올 때에는 적극책을 써서 이들을 정토하고 4군 6진을 두어 조선의 강역을 완정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를 방위하기 위하여 여러 차례 사민을 단행하고 행성을 설축하여 북방족의 침습에 대비하였다.
한편 대일본관계에 있어서도 역시 교린책을 표방하되 왜구 금압이 전제 조건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즉위하자 곧 회유책을 쓴 것이 아니라 상왕과 더불어 대마도를 정토하여 왜의 기를 꺾어 놓았다. 이는 왜구의 소굴을 송두리째 뽑는데는 비록 실패하였으나 왜의 기를 꺾어 놓는 데는 성공하였고 그들이 우리의 통제권 속에 들어오게 하였다. 이러한 결과로 왜구 소탕에 필요했던 국방력을 북방 개척으로 돌릴 수 있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따라서 대마도 정벌 이후에는 회유책과 통제책을 써서 왜구의 침구를 최소화시켰으니, 3포개항이 회유책이요 계해약조가 통제책이었던 것이다.
이같이 세종대에는 국방력이 가장 충실한 때였으며, 사대교린의 묘를 살린 외교로 승평일구(昇平日久)한 시기였다.
그러나 가장 아쉬운 것은 세종이 강력한 국방 의식으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북방을 개척하여 4군 6진을 두어 조선의 강토를 완정하였는데, 지금 우리는 남북 분단이라는 슬픈 시대에 살고 있다.
<참고문헌>
이기훈(2007), 『전쟁으로 보는 한국 역사』, 지성사
전쟁기념사업회(2002), 『한민족 역대 전쟁사』, 행림출판
사회과학 고전 읽기 : 『세종실록』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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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02.21
  • 저작시기200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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