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해결학습 학습지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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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문제해결학습 학습지도안 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단원 설정 이유
2. 교수-학습과정에 있어서의 유의사항
3. 교수-학습 구성도
4. 교수-학습 단계(학습단계에 따른 발문과 예상답안은 교수-학습 예상 대본 참조)
1) 문제의 내용 파악 및 인지단계.
2) 가설 설정 및 검증과정을 위한 가이드 제공
3) 가설에 대한 결론 도출 및 발표
4) 가설 재검증 및 제시된 여러 가설들에 대한 확인
5) 잠정적 결론 도출 및 동남 아시아의 식민지화에 대한 원인에 대한 문제 해결

문제의 내용 파악 및 인지단계
가설설정 및 검증과정을 위한 가이드 제공
가설에 대한 결론 도출 및 발표
가설 재검증 및 제시된 여러 가설들에 대한 확인
잠정적 결론 도출 및 동남 아시아의 식민지화에 대한 원인에 대한 문제 해결

1) 유럽인들이 부르는 동남 아시아의 국명의 의미
2) 향신료의 보고인 동남 아시아와 그 향신료가 유럽에서 가지는 가치
3) 동남 아시아의 기후조건에 대한 유럽, 아메리카와의 비교한 그래프
4) 베트남의 잘못된 선택 - 프랑스를 끌어들이다.
5) 타이만은 동남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식민지가 되지 않았다.

본문내용

어진 향료전쟁을 벌인 에스파냐, 포르투갈, 영국, 네덜란드의 이야기를 담고 이다. 16세기 이후 항해기술이 발달하면서 향료무역의 패권이 베니스 상인에서 에스파냐, 포르투갈로 넘어가게 되었으며, 16세기 말에는 그 주도권을 영국과 네덜란드가 장악하게 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인도네시아의 군도 한 가운데 위치한 런섬은 원래 조용하고 외지의 섬으로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는 지역이었다. 그러나 17세기 초 막대한 양의 육두구가 열리는 런섬은 유럽인이 가장 탐내는 섬이 되었고, 그로인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 영국의 나다니엘 코트호프가 이끄는 몇 명의 영국인 모험가들 사이에 피비린내 나는 치열한 전쟁이 벌어져야 했다. 이 전투의 결과 네덜란드가 런섬을 차지하게 되었지만 네덜란드는 런섬을 차지한 비싼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가 런섬을 차지하려 하였던 것은 그 손해를 만회할 만큼 육두구는 가치있는 향료였고, 특히 유럽에서 육두구는 향료자체만의 의의를 가진다기 보다는 엄청난 부를 약속하는 보증수표였다고 볼 수 있던 것이다.
<가일스 밀턴, 향료전쟁>
3) 동남 아시아의 기후조건에 대한 유럽, 아메리카와의 비교한 그래프
열대 우림 기후 - 기온이 높고 비가 많이 내리며 매일 스콜 현상이 나타난다. 또한, 햇별이 강렬하고 습도도 아주 높아 식뭍이 자라기에 적합하므로 셀바스와 같은 밀림을 이룬다. 그러나 말라리아·수면병·황열병 등의 풍토병이 많아 사람이 생활하기에는 부적당한 곳이며, 오늘날도 문화 수준이 낮은 주민들이 수렵이나 채집 생활 또는 농경 생활을 하고 있다.
콩고 강 유역·아마존 강 유역·동남 아시아 제도·카리브 해 연안과 도서 등 적도 부근이 이에 해당되는 지역이다. 백인들이 진출한 이후에는 커피·카카오·목화·사탕수수·고무 등을 대규모 농장에서 재배하는 플랜테이션이 발달하였다.
4) 베트남의 잘못된 선택 - 프랑스를 끌어들이다.
1883년 7월 베트남의 뜨득 황제가 사망하였다. 그에게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세 양자 중에서 최연장자인 죽 득이 제위를 이었다. 죽 득은 황제로서 황제로서의 자질이 있던 인물이라고 보기는 어려웠지만, 장자 상속의 원칙 때문에 제위에 올랐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조정의 실권을 잡고 있던 똔 텃 뚜옛은 황제의 자질을 문제삼아 3일만아 그를 폐위시켰고, 뜨득의 막내 동생인 홍 젓을 황제로 올립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궁정에서의 음모가 난무하게되었고, 조금씩 접근해 오는 프랑스의 위협에 대해서 적절한 대응을 보여주지 못할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1883년 프랑스는 다수의 군함과 육군을 이끌고 베트남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프랑스에 대한 저항이 불가능해진 베트남은 휴전을 요청하기로 결정하고, 8월 25일 아르망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이 조약으로 베트남은 프랑스의 보호국을 인정하게 되었고, 대외관계는 프랑스를 통해서만 하기로 약속하였다. 프랑스는 동킹 지방의 모든 주요 도시에 베트남 관리에 대한 통제권을 가진 관리를 임명하였고, 이듬해 6월 중국 주재 프랑스 공가 쥘 파트노트르의 주재하에 새로운 조약에 의해 약간의 수정이 가해지게 되었는데 이 조약을 파트노트르 조약이라고 한다. 그 개정된 내용 중 중요한 것은 베트남의 4개 성을 다시 프랑스에 귀속시킨다는 내용이었다.
베트남의 프랑스에의 식민지화는 왕위계승문제에 따른 국내정치의 불안이 나타나게 됨에 따라 프랑스의 침입을 막아내지 못한 것이며, 프랑스는 베트남의 이러한 약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베트남을 보호국화 해 나가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제국주의 열강이 동남 아시아의 힘에 비해 확실한 우위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나, 이러한 힘의 우위에 의한 식민지화가 이뤄졌다고 보는 것 보다는 베트남의 국내 정치 불안과 대외정책의 부재가 그들의 국가운명을 식민지로 이끌어 갔던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5) 타이만은 동남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식민지가 되지 않았다.
타이의 현 왕조인 랏따나꼬씬 왕조는 1782년 창건된 후 현재까지 계승되고 있다. 아유타야 왕국 시대부터 서양과 교섭을 시작해 온 타이는 라마 2세 때부터 본격적으로 서양 제국과 교섭을 시작하였는데 1826년 영구과 버니 조약을 체결하여 서양국가와 평등한 우호통상조약을 체결할 수 있었던 타이는 서구 세력의 팽창과 함께 불가피하게 불평등조약을 체결하여야 했을 것이다. 타이에 경제적인 관심을 보여온 영국은 절대적인 무역의 우위를 보장받을 조약의 체결을 원하였고, 타이는 정치적, 경제적 열세를 감수해야 하는 바우링 조약을 1855년 체결하면서 정치, 경제에서의 열세는 불가피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불평등 조약의 체결은 다른 식민지 국가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타이가 불평등 조약을 맺는 체결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표면적으로는 자발적인 문호개방의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1860년대의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는 프랑스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타이는 태아의 영토 중 일부를 프랑스에 할양하면서도 독립을 유지하고 있었고, 이러한 토지 할양이 영국의 개입이 나타나면서 타이의 지위에 대한 프랑스와 영국의 합의가 나타나게 되었다. 이 합의는 타이의 독립에 대한 공식적인 승인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1897년 영국과의 비밀협정을 통해 확고한 독립을 보장받게 되었다.
사실 타이의 독립유지는 타이의 노력이라고 보기 보다는 자신의 속국과 영토의 일부를 열강에게 넘겨주면서 구걸하면서 얻어낸 독립이고, 영국과 프랑스라는 강대국의 세력의 완충지대가 타이였기 때문에 그 독립을 유지하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동남아 국가 중에서 유일하게 독립을 유지한 타이의 이러한 노력은 분명 약소국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외교정책이었다는 평가를 내리는 데 주저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실제적으로는 강압적 상황에서 많은 것을 잃었던 타이의 독립유지는 외형상으로는 타이의 자국에 의한 형식을 취했다는 점에서 독립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을 충분히 달성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타이의 외교는 타이 외교의 전형적인 특징으로 지적되는 대나무 외교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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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03.19
  • 저작시기20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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