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대전에대한 자료정리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32
  • 33
  • 34
  • 35
  • 36
  • 37
  • 38
  • 39
  • 40
  • 41
  • 42
  • 43
  • 44
해당 자료는 10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10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본문내용

구조변화> 제2차세계대전을 통해 세계정치의 구조적 요인이 크게 바뀌었다. 대전 전의 국제적 고립과 독소전쟁 등으로 인하여 일찍이 붕괴될 것이라고 예상되었던 소련은, 연합국의 대독전쟁에 결정적으로 기여함으로써 사회주의에 대한 내외의 신뢰와 위신을 높이게 되었으며, 대전 후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하는 초강대국으로서의 국제적 발언권이 강화되었다. 대독전쟁의 반격 과정에서 동유럽과 중부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나치스독일과 결탁했던 전통적 지배층이 일소되고 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반파시즘세력이 정권을 장악, 인민민주주의라 불리는 체제를 수립하였다. 이렇게 해서 과거의 반소 <방역선>은 와해되었으며,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권이 확대되었다. 서유럽 쪽에서는 이를 소련의 팽창으로 보고 반발하였다. 제1차세계대전이 제국주의체제의 일각을 허물고 혁명운동민족해방운동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면 제2차세계대전은 제국주의체제를 더욱 약화시키고 혁명운동민족해방운동을 강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 항일전쟁을 이겨낸 중국은 세계 5대국의 하나가 되었으나, 국공 대립은 내전으로 발전하였으며, 결국 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동남아시아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는 베트남공화국이 수립되었고,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에서는 인도네시아공화국이 수립되었다. 프랑스네덜란드는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려 했으나, 제2차세계대전 전의 식민지로 되돌려 놓을 수는 없었다. 그것은 이미 동아시아동남아시아의 구미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 지배체제가 일본의 침략으로 인하여 파괴되었고,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일본의 야욕에 대한 저항을 통하여 민족해방운동이 비약적으로 고조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인도로부터 중동아프리카에 이르는 지역에서도 민족해방운동이 고조되어 독립국이 잇따라 생겨났다. 동유럽중부유럽에서의 영국의 정치적경제적 지배는 무너졌으며, 유럽대륙에 대한 전통적인 세력균형책의 전제는 상실되었다. 더욱이 대전을 계기로 미국과의 관계는 역전되어 미국에 대한 종속만 깊어졌다. 45년 7월 총선거 결과 처칠 대신에 C.R.애틀리가 이끄는 노동당정부가 수립되었다. 국민은 국내를 개혁함으로써 격동하는 세계정치적 상황에 대응하는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프랑스는 1940년 6월 전쟁에 패배한 후부터 나치스독일의 종속국적 지위로 전락했으나, 민중의 저항운동으로 그 명예를 회복하였다. 드골은 이러한 저항운동을 통일하고 새로운 제4공화정의 기초를 확립함과 동시에 미영소 다음가는 강대국의 지위를 획득하고 미국소련 사이에서 독자적인 대독정책을 추구하였다. 이리하여 자본주의세계에서는 유독 미국만이 생산력을 발전시키고, 최대최강의 자본주의국가로서 피폐된 자본주의세계를 지도하게 되었다. 미국은 이미 45년 1월, 소련의 약 600억 달러의 신용공여(信用供與) 요청을 거부하고, 5월에는 소련에 대해 무기대여법에 의한 무기 인도를 엄격하게 제한하였다. 8월에 대일전쟁에서 원자폭탄을 사용한 것도 어떤 면에서는 소련을 겨냥한 위협이기도 했던 것이다. 미국과 소련은 대립하기 시작하였고, 이에 따라 제2차세계대전의 종결과 더불어 <냉전>이 시작되었다.
<평화조약> 미국소련을 양극으로 하는 체제의 대립이 격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평화조약을 체결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46년 7~10월 파리평화회의에서 트리에스테문제를 둘러싸고 미소가 대립하였으며, 47년 2월 10일 겨우 이탈리아루마니아헝가리불가리아핀란드에 대한 강화조약이 조인되었다. 이탈리아는 북아프리카의 식민지를 잃었고 프랑스유고슬라비아그리스에 대한 영토의 일부를 넘겨주었다. 트리에스테는 국제연합 통치하의 자유지역이 되었으나, 54년 이탈리아와 유고슬라비아에 분할됨으로써 일단 해결을 보았다. 루마니아는 40년 소련에게 영토할양을 재확인하였으나, 트란실바니아지방 대부분을 되찾았다. 헝가리의 국경은 대략 1938년의 국경으로 정해졌다. 불가리아는 남(南)도브루자지방 영유가 인정되었고, 41년의 국경을 대략 유지하였다. 핀란드에 대해서는 39년 소련핀란드전쟁에 따라 소련에 대한 영토할양이 인정되었다. 독일처리의 방침은 45년 8월 2일의 포츠담의 정서로 분명하게 규정되었으나 그 해석을 둘러싸고 미국소련이 빈번히 대립했으며 47년 말 런던 4개국 외무장관회의는 결렬되었다. 49년에는 독일연방공화국(서독)과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이 수립되었는데, 미국영국프랑스는 52년 5월 서독과 <평화약속> 조약을 맺었으며, 54년 10월에는 파리협정으로 서독의 주권을 회복시킴으로써 사실상의 단독강화를 맺었다. 이에 대하여 소련은 53년 5월 동독에 자립권을 부여하고, 55년 9월 주권을 회복시켰다. 이리하여 2개의 독일이 고착화되었다. 이 때 평화조약은 체결되지 않았으나, 70년 서독이 오데르나이세의 국경선을 인정하고, 72년 동독서독 사이에 기본조약이 조인되면서 평화조약이 점진적으로 실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대일처리방침은 1945년 7월 26일의 포츠담선언에 명시되었는데, 대일강화문제에서도 미국소련은 의견이 분열되었으나 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대일 강화조약이 조인되었다. 그러나 소련체코슬로바키아폴란드는 조인을 거부하였다. 중국은 초청되지 않았으며, 인도미얀마유고슬라비아는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대만인도미얀마는 뒤에 일본과 평화조약을 체결하였다(대만과 일본의 평화조약은 72년 9월 중국과 일본 사이의 국교수립으로 인해 소멸되었다).
〔대전 연구사의 동향〕 대전사(大戰史)연구를 고찰해보면, 거기에는 전후사(戰後史) 전개가 강하게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미국소련을 양극으로 두 진영의 대립이 격화된 이른바 냉전기에는, 미국이 《독소관계문서집》에서 <독소불가침조약의 비밀부속의정서 >를 폭로하여 소련의 대전책임을 시사하자, 소련은 《역사의 위조자》에서 영국프랑스의 유화정책을 격렬하게 비난하였다. 그 뒤 대전사 연구의 무게중심은 1939년 여름으로 옮겨졌다. 대전의 역사적 의의를 어떻게 파악하느냐, 즉 근대사의 발전 내지 전망 속에서 대전의 위상을 어떻게 정립하느냐 하는 것은 독소관계와 유화정책에대한 평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연구사상 유명한 테일러논쟁도 히틀러 및 유화정책에 대한 평가를 둘러싸고 전개되었던 것이다.
  • 가격2,000
  • 페이지수44페이지
  • 등록일2008.03.27
  • 저작시기2008.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57916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