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근대사회의 신분과 계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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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씩의 주를 두어 9주로 편제
③ 687년 왕의 직속부대로서 9서당 창설
④ 9주의 자연신에 대한 제사를 재편
2. 신라중대의 전제왕권과 민중의 생활
- 기존의 귀족세력을 억제하고 두품세력을 부각시킴
① 방계 왕족이던 김춘추는 가야왕실의 후손인 김유신과 결탁하여 새로운 세력 형성
② 신문왕 때 이르러 김흠돌의 난을 평정하면서 전제왕권을 확립
③ 김씨 왕족이 왕권을 제약하는 세력으로서보다는 옹호하는 세력으로 변질되고 박씨세력이나 가야계 및 고구려계 귀족은 점차 정권에서 소외
④ 6두품 세력은 학문적 식견을 바탕으로 국왕의 정치적 조언자 역할 수행하여 왕권과 결탁하여 상대적으로 부각
- 통치조직의 정비
① 중앙기구는 당나라의 제도를 정비하여 집사부 중심으로 운영되도록 하여 장관인 중시의 권한이 대폭 확대
② 집사부는 왕의 입장을 대변하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전제왕권을 강화하는데 일익을 담당
③ 신라사회의 미숙성으로 당나라 제도를 전면적으로 받아들이는데 한계가 있어 여전히 상대등, 병부 위주의 전통적인 권력구조 지속
④ 9주 5소경 제도 마련하여 주현을 중심으로 한 지방통치체제 성립
→ 주, 군, 현 및 소경의 장관을 중앙에서 파견
→ 주군에는 외사정이 파견되어 감찰임무 수행
→ 주의 장관은 군사적 성격이 강한 군주에서 행정적 성격이 강한 총독으로 바뀜
→ 지방의 말단은 지방 토착세력인 촌주가 파견되어 지역의 자치 담당하게 하고 지방세력 견제를 위해 상수리제도 시행
⑤ 군사조직으로 9서당 10정
⑥ 토지제도의 정비
→ 687년 관리들에게 관료전 지급, 689년 세조를 차등있게 지급하는 대신 녹읍 폐지
⇒ 귀족들에게 주어진 力役징발권을 빼앗아 중앙정부가 직접 통제하려는 의도
→ 귀족의 반발로 757년 녹읍이 부활되고 귀족에 대한 왕권전제화 정책의 한계 노출
⑦ 유교정치사상
→ 682년 국학이 설립
→788년 원성왕 때 독서삼품과 마련되면서 유교적 이데올로기 확립
3. 민중의 생활(촌락문서 통해서 확인)
① 호는 상상호에서 하하호까지 9등급으로 나누었는데 人丁의 많고 적음을 기준으로 하였다.
② 사람들은 성별, 연령별로 파악하면서 노비는 따로 파악하여 국가에서 역역동원을 용이하게 하고자 함
③ 일반 농민에게 연수유전답 지급(농민의 사유지에 대한 국가의 소유권 인정)
④ 촌주에게 촌주위답, 관청 소유지인 관모전답, 관료전인 내시령답, 국가에 삼을 공납하기 위한 마전으로 토지구성
⑤ 일반 농민은 각기 자신의 토지를 소유하여 경제적으로 독립했으나 촌에 할당된 공유지를 공동 경작하였으며, 필요한 역역을 부담하여 공동체적인 질서가 상당히 잔존
4. 발해사의 전개과정과 사회구조
1) 발해의 건국과정
- 696년 거란의 이진충과 손만영이 영주도독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켜 일시적인 정치적 공백이 나타나자 고구려 유민, 말갈집단이 이 때를 기회로 영주에서 벗어나 만주 동부 지역으로 이동
- 만주 동부지역에 남아있던 고구려유민과 말갈인까지 규합하여 698년 동모산 기슭에서 진국 수립
- 건국 이후 돌궐에 사신을 보내어 친선을 통해 당의 위협에서 벗어나고자 함
2) 발해의 발전
- 711년 당과 돌궐의 친선이 나타나면서 발해도 713년 당과 외교
→ 당에서도 최흔을 보내어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임명하고 이로부터 발해라는 국명 사용
- 719년 대조영 사후 대무예가 왕이 되면서 영토 확장에 주력
→ 신라는 발해의 영토확장을 경계하여 강릉지방에 성을 쌓음
→ 발해의 확장에 두려움을 느낀 흑수말갈은 발해와이 화친을 깨고 당과의 연결 도모하자 대무예가 자신의 동생을 보내 흑수말갈을 공격
- 732년 거란이 발해에 당을 같이 공격할 것을 약속하여 발해는 장문휴를 보내어 당의 등주를 공격하였고 당은 신라를 끌어들여 발해의 남쪽을 공격하려 하나 실패
- 737년 문왕이 즉위하면서 내부 체제 정비에 주력
→ 상경으로 도읍을 옮겨 발전 도모
→ 동북방면의 말갈부락 복속시키고 여러 부를 설치
→ 발해군왕에서 발해국왕으로 승진
- 10대왕 선왕 때 다시 중흥
→ 흑수말갈세력 통제하여 대부분의 말갈지역 복속, 요동지방에 대한 당의 지배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요하유역까지 진출
→ 10세기 초 거란이 진출하기 전까지 요동지역에 대한 지배권 유지
→ 발해 최대판도 이루면서 5경 15부 62주의 지방제도 완비하였고, 당에게서 해동성국의 칭호 얻음
3) 발해의 쇠퇴
- 발해가 쇠퇴기에 접어들면서 거란이 발흥
→ 발해의 태조인 야율아보기가 거란족을 통일하고 916년 황제가 되어 중원 진출도모
→ 중원 진출에 앞서 배후세력을 제거하려고 하여 925년 발해를 공격, 926년 멸망
- 발해 멸망한 뒤에 거란은 이곳에 동단국을 세우고 통치하였고 928년에는 동단국을 요동으로 옮기면서 발해유민을 강제 이주
- 발해 멸망 이후 각지에서 부흥운동
→ 멸망직후 발해의 서경압록강 지역에서 일어난 후발해국과 이어 나타난 정안국, 부여부와 상경용천부에서 일어난 세력집단과 오간국, 요의 동경도에서 일어난 흥령국, 고연모의 대발해국, 거란 상경 부군에서 활약한 고욕의 저항등 200여년이 지난 뒤에도 계속됨
→ 발해에 항거한 무리 외에도, 거란 지배계층에 참여, 거란과 반독립적 독립을 유지하다가 여진으로 변화된 부류, 고려로 망명한 부류들이 있음
4) 남북국 시대론
- 유득공이 최초로 <발해고>를 통해서 드러낸 입장
- 남북국시대를 제기하는데 있어 발해와 신라의 관계를 재검토할 필요가 있음
→ 중국의 분열조종정책에 이용당하여 시종 대립
→ 정상적 상호 교류와 대립이 교차
→ 당에서는 발해에 대한 과거의 우위를 지키려는 신라와 현실적인 우위를 확인 받으려는 발해사이에 갈등
⇒ 897년 발해가 신라사신의 윗자리에 앉기를 요구
⇒ 869년부터 873년까지 발해의 오소도와 신라 이동 사이에 빈공과의 수석다툼, 906년 최언위와 오광찬 사이의 등제석차 다툼
→ 신라와 발해의 교류
⇒ 신라는 대조영에게 5품인 대아찬의 벼슬 주었고, 790년과 812년 상호 사신 파견
⇒ 신라도를 통해서 상호 교류 확인 가능, 신라 국경의 천정군과 발해의 책성부 사이에 39개의 역이 설치
⇒ 거란의 위협을 받는 과정에서 발해와 신라가 비밀리에 연계하려는 움직임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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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05.16
  • 저작시기200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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