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목차 >
1. 머리말
2. 대약진운동(大躍進運動)의 대실패와 조정 정책
3. 홍위병(紅衛兵)의 활동
4. 천안문사태(天安門事態)와 그 이후
7. 맺음말
1. 머리말
2. 대약진운동(大躍進運動)의 대실패와 조정 정책
3. 홍위병(紅衛兵)의 활동
4. 천안문사태(天安門事態)와 그 이후
7. 맺음말
본문내용
것을 의미한다. 천안문사태는 그러한 대중의 성장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천안문사태 이후 사인방은 자신들의 주요 정적을 제거함으로써 사인방의 천하가 도래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들의 승리는 오래가지 않았다. 1967년 5월 탕산(唐山) 대지진이라는 재난 속에서도 등소평을 반대하는 캠페인을 계속할 것을 주장함으로써 그들의 고립은 심화되었고, 오직 모택동을 통해서만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그들은 1976년 9월 9일 모택동이 사망함으로써 당내 지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모택동 사망이후 당내 당 주석직 획득을 두고 권력투쟁이 일어났다. 사인방은 강청의 당 주석직 획득을 적극 추진하고자 하였으나 이를 저지하려는 반사인방 연합이 속히 구성되었다. 바로 화국봉(華國鋒) 등 문화대혁명파 온건그룹, 이선념(李先念) 등 주은래계의 주간파 관료그룹, 왕전 등 다시 등용된 간부그룹, 섭검영(葉劍英) 등 군 장로 그룹의 연합이 이것이다. 이 가운데에 섭검영이 화국봉의 후견인 역할을 담당했다. 모택동 사후 1주일째인 9월 16일, 『인민일보』는「모(毛) 주석은 영원히 우리의 가슴속에 있다」라는 제목의 사설을 발표했다. 『인민일보』는 여기에서 문화대혁명 노선의 계승과 그에 어울리는 후계자를 정하자는 과제를 제기하고, “기정방침에 따라 행동하자”라고 호소했다. ‘지정방침’은 사인방 주장의 핵심으로, 강청 식의 표현에 따르면 “모(毛) 주석은 화국봉 동지를 부주석에 지명했을 뿐, 당 주석에 취임하는 것을 제안하지는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반사인방 연합은 3가지 필요한 것과 3가지 불필요한 것(마르크스주의단결‥공명정대가 필요하고, 수정주의분열음모 간계는 그만두어야 한다)을 핵심내용으로 삼았다. 이것은 1975년 5월, 모택동이 정치국에 “강청은 야심을 갖고 있다”라며 충고할 때 했던 말이라고 한다. 10월 4일『광명일보』에 양효(梁效;사인방 그룹의 필명)의 논문인 「영원히 모(毛) 주석의 기정방침에 따라 실천하자」가 게시되었다. 이로써 즉각 공격받게 된 반사인방 연합 세력은 10월 6일, 선수를 쳐서 반격에 나섰다. 우선 중남해(中南海)에서 왕홍문과 장춘교를 체포하고, 강청과 요문원 등을 자택에서 체포하여 불과 한 시간 내에 그들을 권좌에서 끌어내렸다. 이때 힘심 인물은 오랫동안 모택동 경호를 담당한 중앙판공청 주임으로 중남해의 정보를 한 손에 장악하고 있던 왕동흥(汪東興)이었다. 그는 그 공적으로 당 부주석의 자리를 거머쥐었다. 다음날인 7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화국봉의 당 주석,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의 취임 결정을 발표했다. 아마코 사토지, 임상범 옮김, 위의 책, pp.124-126.
곧 사인방의 체포와 실각 소식이 퍼졌고 이는 문화대혁명의 종결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4. 맺으며
중국 공산당 제9차 전국대회에서 결론지어진 문화대혁명은 모택동이 말한 끊임없는 계급투쟁이 확대되어 착취계급이 지배하는 정치체제를 폭력으로 타도하는 ‘연속혁명계속혁명’도 아니었으며, 새로운 사상문화풍속습관을 창조했던 ‘사람들의 영혼을 건드리는 혁명’(「16조」) 같은 것은 전혀 아니었다. 아마코 사토지, 임상범 옮김, 위의 책, pp.102~103.
오히려 문화대혁명은 자신들을 억누르고 있던 사회 체제에 대한 대중들의 저항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문화대혁명의 전개 과정에서 대중들이 “반란을 일으키라”는 모택동의 호소에 모택동이 원했던 만큼 이상의 행동을 보였고, 그 속에서 자신들의 불만을 표현했다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모택동이 당 내에서 자신의 실권을 잡고 그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대중들을 문화대혁명에 동원했지만, 대중들은 점점 그 타도에 대상을 넓혀 사회 체제에 대해 저항했다. 그리고 모택동이 대중들을 저지하려고 하자 대중들은 한 때 자신들이 신격화 하고 숭배했던 모택동에 대해서 저항하는 모습까지도 보였다. 이는 더 이상 대중들이 지배층에 의해서 움직이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사회의 변화를 열망하며, 적극적으로 그 변화를 이루고자 저항했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문화대혁명에서의 대중운동은 1960년대 말의 전 세계적인 반란 미국의 흑인 공민권 운동과 반전운동, 유럽에서의 반전 운동, 학생 반란 등.
의 일부로서 이해해야 한다. 이는 당시 홍위병을 포함한 대중의 활동이 ‘정신을 뒤흔드는 진정한 혁명’, ‘세기의 대실험’ 히메다 미쓰요시 외, 김순호 옮김, 위의 책, pp.217-218.
으로서 프랑스일본 등의 지식인이나 학생운동마저 움직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문화대혁명에서 대중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기존의 연구들은 문화대혁명을 당 내부의 권력 투쟁으로 규정하고, 그러한 관점으로 연구하고 있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연구의 경향은 문화대혁명에서 대중의 중요성을 간화하고 있으며, 앞으로 대중을 중심으로 한 문화대혁명에 관한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 참고문헌 ◈
<단행본>
- 김종현, 곽수경 공저, 『현대 중국의 이해』, 학고방, 2002.
- 시쉬엔, 진춘밍 공저, 『문화대혁명사』, 나무와 숲, 2000.
- 아마코 사토지, 임상범 옮김,『중화인민공화국 50년사』, 일조각, 2003.
- 오쿠무라 사토시, 박선영 옮김,『새롭게 쓴 중국 현대사』, 조합공동체 소나무, 2001.
- 조영명,『중국 현대사의 재조명』, 온누리, 1985.
- 찰리 호어, 김희정 옮김, 『천안문으로 가는 길』, 책갈피, 2002.
- 히메다 미쓰요시 외, 김순호 옮김, 『20세기 중국사』, 돌베게, 1995.
<논문>
- 김영심, 「모택동의 리더십과 공과」,培材大學校 國際通商大學院 , 2001.
- 김원열, 「민중의 관점에서 바라본 문화대혁명 - 평등 지향의 민중 혁명을 중심으로」, 『시대화 철학』 Vol.14,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03, pp.455~476.
- 박명희,「문화대혁명의 기인에 관한 고찰」,『중국』,단국대학교부설 중국연구소, 1995, pp.59~104.
- 최관장,「중국문화대혁명(1966~1976)에 관한 연구」,『중국연구』Vol.25, 한국 외국 어대학교 외국학 종합 연구 센터 중국연구소, 2000, pp.1~33.
천안문사태 이후 사인방은 자신들의 주요 정적을 제거함으로써 사인방의 천하가 도래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들의 승리는 오래가지 않았다. 1967년 5월 탕산(唐山) 대지진이라는 재난 속에서도 등소평을 반대하는 캠페인을 계속할 것을 주장함으로써 그들의 고립은 심화되었고, 오직 모택동을 통해서만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그들은 1976년 9월 9일 모택동이 사망함으로써 당내 지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모택동 사망이후 당내 당 주석직 획득을 두고 권력투쟁이 일어났다. 사인방은 강청의 당 주석직 획득을 적극 추진하고자 하였으나 이를 저지하려는 반사인방 연합이 속히 구성되었다. 바로 화국봉(華國鋒) 등 문화대혁명파 온건그룹, 이선념(李先念) 등 주은래계의 주간파 관료그룹, 왕전 등 다시 등용된 간부그룹, 섭검영(葉劍英) 등 군 장로 그룹의 연합이 이것이다. 이 가운데에 섭검영이 화국봉의 후견인 역할을 담당했다. 모택동 사후 1주일째인 9월 16일, 『인민일보』는「모(毛) 주석은 영원히 우리의 가슴속에 있다」라는 제목의 사설을 발표했다. 『인민일보』는 여기에서 문화대혁명 노선의 계승과 그에 어울리는 후계자를 정하자는 과제를 제기하고, “기정방침에 따라 행동하자”라고 호소했다. ‘지정방침’은 사인방 주장의 핵심으로, 강청 식의 표현에 따르면 “모(毛) 주석은 화국봉 동지를 부주석에 지명했을 뿐, 당 주석에 취임하는 것을 제안하지는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반사인방 연합은 3가지 필요한 것과 3가지 불필요한 것(마르크스주의단결‥공명정대가 필요하고, 수정주의분열음모 간계는 그만두어야 한다)을 핵심내용으로 삼았다. 이것은 1975년 5월, 모택동이 정치국에 “강청은 야심을 갖고 있다”라며 충고할 때 했던 말이라고 한다. 10월 4일『광명일보』에 양효(梁效;사인방 그룹의 필명)의 논문인 「영원히 모(毛) 주석의 기정방침에 따라 실천하자」가 게시되었다. 이로써 즉각 공격받게 된 반사인방 연합 세력은 10월 6일, 선수를 쳐서 반격에 나섰다. 우선 중남해(中南海)에서 왕홍문과 장춘교를 체포하고, 강청과 요문원 등을 자택에서 체포하여 불과 한 시간 내에 그들을 권좌에서 끌어내렸다. 이때 힘심 인물은 오랫동안 모택동 경호를 담당한 중앙판공청 주임으로 중남해의 정보를 한 손에 장악하고 있던 왕동흥(汪東興)이었다. 그는 그 공적으로 당 부주석의 자리를 거머쥐었다. 다음날인 7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화국봉의 당 주석,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의 취임 결정을 발표했다. 아마코 사토지, 임상범 옮김, 위의 책, pp.124-126.
곧 사인방의 체포와 실각 소식이 퍼졌고 이는 문화대혁명의 종결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4. 맺으며
중국 공산당 제9차 전국대회에서 결론지어진 문화대혁명은 모택동이 말한 끊임없는 계급투쟁이 확대되어 착취계급이 지배하는 정치체제를 폭력으로 타도하는 ‘연속혁명계속혁명’도 아니었으며, 새로운 사상문화풍속습관을 창조했던 ‘사람들의 영혼을 건드리는 혁명’(「16조」) 같은 것은 전혀 아니었다. 아마코 사토지, 임상범 옮김, 위의 책, pp.102~103.
오히려 문화대혁명은 자신들을 억누르고 있던 사회 체제에 대한 대중들의 저항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문화대혁명의 전개 과정에서 대중들이 “반란을 일으키라”는 모택동의 호소에 모택동이 원했던 만큼 이상의 행동을 보였고, 그 속에서 자신들의 불만을 표현했다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모택동이 당 내에서 자신의 실권을 잡고 그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대중들을 문화대혁명에 동원했지만, 대중들은 점점 그 타도에 대상을 넓혀 사회 체제에 대해 저항했다. 그리고 모택동이 대중들을 저지하려고 하자 대중들은 한 때 자신들이 신격화 하고 숭배했던 모택동에 대해서 저항하는 모습까지도 보였다. 이는 더 이상 대중들이 지배층에 의해서 움직이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사회의 변화를 열망하며, 적극적으로 그 변화를 이루고자 저항했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문화대혁명에서의 대중운동은 1960년대 말의 전 세계적인 반란 미국의 흑인 공민권 운동과 반전운동, 유럽에서의 반전 운동, 학생 반란 등.
의 일부로서 이해해야 한다. 이는 당시 홍위병을 포함한 대중의 활동이 ‘정신을 뒤흔드는 진정한 혁명’, ‘세기의 대실험’ 히메다 미쓰요시 외, 김순호 옮김, 위의 책, pp.217-218.
으로서 프랑스일본 등의 지식인이나 학생운동마저 움직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문화대혁명에서 대중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기존의 연구들은 문화대혁명을 당 내부의 권력 투쟁으로 규정하고, 그러한 관점으로 연구하고 있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연구의 경향은 문화대혁명에서 대중의 중요성을 간화하고 있으며, 앞으로 대중을 중심으로 한 문화대혁명에 관한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 참고문헌 ◈
<단행본>
- 김종현, 곽수경 공저, 『현대 중국의 이해』, 학고방, 2002.
- 시쉬엔, 진춘밍 공저, 『문화대혁명사』, 나무와 숲, 2000.
- 아마코 사토지, 임상범 옮김,『중화인민공화국 50년사』, 일조각, 2003.
- 오쿠무라 사토시, 박선영 옮김,『새롭게 쓴 중국 현대사』, 조합공동체 소나무, 2001.
- 조영명,『중국 현대사의 재조명』, 온누리, 1985.
- 찰리 호어, 김희정 옮김, 『천안문으로 가는 길』, 책갈피, 2002.
- 히메다 미쓰요시 외, 김순호 옮김, 『20세기 중국사』, 돌베게, 1995.
<논문>
- 김영심, 「모택동의 리더십과 공과」,培材大學校 國際通商大學院 , 2001.
- 김원열, 「민중의 관점에서 바라본 문화대혁명 - 평등 지향의 민중 혁명을 중심으로」, 『시대화 철학』 Vol.14,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03, pp.455~476.
- 박명희,「문화대혁명의 기인에 관한 고찰」,『중국』,단국대학교부설 중국연구소, 1995, pp.59~104.
- 최관장,「중국문화대혁명(1966~1976)에 관한 연구」,『중국연구』Vol.25, 한국 외국 어대학교 외국학 종합 연구 센터 중국연구소, 2000, p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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