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한 분단에 관한 경제사적 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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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머리말

2. 일제말기 남북한 지역의 분업구조

3. 8‧15 직후 남북한 경제교류

4. 남북한 경제관계의 단절과 경제구조의 재편성

5. 맺음말

본문내용

11.2
(153,331) (8.8)
(22,123) (1.3)
38,267 2.2
68,034 3.9
소 계
484,858 27.9
<원자재부문>
농업물자
소맥
대맥
원면
291,287 16.8
(50,294) (2.9)
(28,404) (1.6)
(173,470) (10.0)
소 계
1,253,500 72.1
총 계
1,738,358 100.0
자료 : 홍성유, 한국경제의 자본축적과정, 고대아세아문제연구소,
, 302-304면.
표 12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시설재부문에서 전력이 ICA원조 총액의 3.0%, 제조가공업(비료공장 건설자재 및 기술용역비 3,454만달러 포함)이 4.2%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원자재부문에서는 비료 19.1%, 인견사 3.4%, 화학약품 1.6%, 지류 1.3%, 목재 2.0%, 시멘트 0.6%를 차지하는 등 ICA원조 총액의 35.2%를 차지하는 이들 품목들은 한국전쟁 이전까지 북한에 의존하던 반입품들이었다. ICA 총원조액의 35.2%는 결코 작은 비중이 아니며 이들 부문이 남한지역에 투자됨으로써 이제 남한 경제는 예전에 북한지역과 상호보완적 관계에서 벗어나 점차 분단구조로 재편되어 갔다.
다음에 살펴볼 DLF자금은 제 4 단계에 해당되기는 하지만 이제까지의 원조와 성격을 달리하는 차관형식으로 남한에 공여된 것이다. DLF자금은 1958년 회계년도부터 미국의 ‘상호안전보장계획’의 일환으로서 후진국의 경제개발을 지원하기 위하여 차관형식으로 공여되는 개발차관기금이었다. 이 자금은 1960년대에 시행되었지만 1950년대말에 차관 신청을 하였으며, 신청내역에서 당시 남한 경제구조가 재편되어 가는 단초를 찾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표 13은 1958, 59년도에 대한민국정부가 신청한 DLF차관 내역이다.
표 13 DLF에 대한 차관 신청내역
단위 : 천달러
1958년도 신청내역
비율(%)
1959년도 신청내역
비율(%)
수력발전소 25,000
철광개발 1,000
소다회공장 3,400
제철공장 3,000
전신전화현대화 3,500
시멘트공장확장 2,140
인견사공장 9,612
PVC공장 1,80
제염공장 2,370
나이론사공장 2,187
덕판공장 2,461
44.3
1.8
6.0
5.3
6.2
3.8
17.0
3.2
4.2
3.9
4.4
비료공장 30,000
전기제철공장 8,000
제2차 시멘트공장확장 4,233
토리움금속압출공장 752
철도객차현대화 14,500
제1차 토지개간계획 13,500
어선도입 1,560
가축부화개선 2,720
타이어공장확장 1,530
중소기업발전 10,000
제 2한강인도교건설 8,000
31.6
8.4
4.5
0.8
15.3
14.2
1.6
2.9
1.6
10.5
8.4
합 계 56,470
합 계 94,796
100.0
자료 : 한국은행조사부, 경제연감, I-127면
1958년도 DLF차관 신청내역 중 수력발전부문이 44.3%, 소다회공장 6.0%, 제철공장 5.3%, 시멘트공장 확장 3.8%, 인견사공장 17.0%, PVC공장 3.2%, 제염공장 4.2%를 차지하였다. 1958년도 신청금액 총액의 83.8%인 4,700여만달러가 남북한 교역의 단절로 인해 시설투자되는 것이었다. 또 1959년도의 경우는 비료공장 31.6%, 전기제철공장 84%, 제2차시멘트공장 확장 4.5% 등 1959년도 차관신청 총액의 44.5%인 4,200여만달러도 같은 성격을 띠고 있다. 남북한 교역 단절 이후 원조 제 4 단계에 들어와서 남한 정부는 북한의존적이던 반입품목 및 관련 산업부문에 대해서 원조자금으로 상품수입 또는 산업시설투자를 함으로써 815 직후 북한지역과 상호 보완적이었던 부분을 대체해 나갔다.
이상에서 남북분단 이후 받아들인 원조중 UNKRA원조의 29.3%, ICA원조의 35.2%, DLF 58년 차관신청액의 85.7% 59년 신청액의 45.3%가 예전에는 남한이 북한에 의존적이던 산업 분야에 사용되면서 원조가 815 직후 북한지역으로부터 반입해 왔던 물자들을 대체해 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5. 맺음말
815 직후 이루어졌던 남북한 분단과정은 1940년대 남북한 단일경제권이 재편되어 가는 또 다른 측면이었다. 남북지역간의 경제적 관계는 일제시대에 이미 불완전하나마 지역간 분업체계를 형성하여왔지만, 식민지라는 특성상 양 지역간의 유기적 관계가 그렇게 긴밀하게 발전되어 왔던 것은 아니었다. 그 이유는 조선경제의 발전이라는 것이 조선경제 자체의 필요성에서 출발하였던 것이 아니라, 일제의 원블록 구상에 끼워 맞추어가는 형식을 취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시대에 남북한지역은 조선은행권이라고 하는 단일 통화에 의해 묶여 있었으며, 전력을 매개로 하여 남북한지역간 상호 의존관계를 나타내었고, 재래시장이나 전시배급에 의한 강제유통 등에 의해서 지역간 분업을 발전시켜 나가고 있었다. 이러한 관계는 815 직후 2-3년 경과후에도 여전히 유효하였으며 어떤 분야는 오히려 일제시대 보다도 강화되는 면목을 보이기도 하였다.
한편 남북분단을 알리는 최초의 신호는 1947년 12월 북한에서의 화폐개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가운데 1948년 514 단전까지 이북으로부터의 송전량은 일제시대 수준을 훨씬 능가하였고, 또 남북한교역은 1949년 4월까지 지속되었다. 물론 이러한 과정들은 결국 남북한을 분단의 길로 들어서게 하고 말았지만, 여기서의 주요 연구 목적은 815부터 분단까지 전개되었던 남북한 경제적 관계 자체를 재검토하는데 있었다. 분단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더라도 경제 주체들의 끊임없는 통일에 대한 열망의 표출이 815 직후 이루어졌던 남북한교역이라고 한다면 성공한 분단의 비중 만큼이나 실패된 통일의 비중 또한 간과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815 직후 전개되었던 남북한지역간 경제적 관계의 전개과정을 재검토하고자 하였던 것인데, ‘815 전후 1940년대’에 대한 통시적 관점과 ‘남북한지역’ 모두를 연구 범위로 설정하여 분석하고자 하였던 최초의 의도가 생각한 만큼 결과를 얻지는 못하였지만 이것은 향후 연구과제로 남겨두기로 하고 글을 맺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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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10.30
  • 저작시기20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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